WRITER : 아매오
‘매스(mass)’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무난’은 부정적이다. ‘엣지(edge)’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니치(niche)’는 부정적이다. 매스를 타깃으로 하면 무난해진다. 엣지를 넣으면 니치해진다. 지나가던 ‘직관적’과 ‘느낌적’이 말한다. “난 뭐든지 될 수 있어(옛다 이가흔 톤으로).” 그들은 늘 긍정성과 부정성을 사이 좋게 나눠 갖는다. 직관적이면 느낌적이지 않고 느낌적이면 직관적이지 않으니까. 피드백 받는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물론 입장 바꿔 놓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다. 내가 피드백 주는 입장이 돼도 매스에 어필할 수 있으면서도 엣지가 있고 직관적이면서 느낌 있는 걸 원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피드백' 자체가 현 상태에서 아쉬운 걸 이야기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미치고 팔짝 뛰려다가도 이내 엉덩이를 의자에 착 붙이고 다시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매스를 놓치지 않으면서…엣지를 넣고…직관적이고…느낌 있게… 부족한 역량 탓에 하염없이 시간만 흐른다. 아이고 두야!
한 마리 토끼만 잡고 살 수는 없는 걸까? 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드는 찰나, 왠지 일 잘하는 마케터들이 즐겨 읽는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을 것 같다. “실은 경쟁이 극심한 시장에선 한 마리 토끼를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중간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죠. 하지만 기억하세요. 두 마리 토끼를 노리지 않으면 시장을 선도할 가능성조차 없습니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성공하는 1%는 두 마리 토끼를 노리는 이들 중에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당신도 그들이 돼야 합니다.”
언론사 입사 스터디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비’를 제시어로 놓고 작문을 한 날이었다. 당시 아일랜드 총리로 취임한 성소수자 리오 바러드카의 이야기와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부 문구 중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하리라(ARBEIT MACHT FREI)’의 B가 일반적인 B와 다른 형태로 돼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 썼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는데, 대충 사회적 소수는 개별적으로 소수지만 그 소수성 자체가 점진적으로 다수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현장에서 글을 쓰고 돌려 읽으며 원고지에 피드백을 적는다. 스터디원들의 피드백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논리가 깔끔하고 사례도 구체적이어서 눈길이 가지만 ‘소수자’라는 주제가 신선하지는 않아 아쉬움.” 근데 사실이다. 같은 주제로 수십수백 명이 쓴 글을 ‘채점’하는 입장에서 보면 ‘신선함’은 아주 중요하다. 깔끔한 논리에 구체적 사례로 꾸며 높은 점수를 받아도 신선하지 않은 주제를 택하면 웬만해서 일등은 어렵다. 아아. 토끼는 잡으면 잡을수록 좋은 건가? 마치 아삽?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개별 소수자는 여전히 곳곳에서 소외되고 있는데 ‘소수자’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린 이슈는 사람들의 눈에 익어버려서 사회적 의제로서 폭발력을 가지기 어렵다니. ‘신선하지 않은 주제’라는 피드백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딘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회의감도 조금 들었던 듯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기자가 되려는 건데, 기자가 되는 시험에선 이런 이야기가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울 수 있다니.
당연한 얘기지만 반드시 다 그런 건 아니다. 논리를 더 탄탄하게 다듬고 더 구체적인 사례를 탐구해 계속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의제를 만들며 논의를 진전시키는 사람들. 그래서 결국 신선하지 않아 보였던 것도 신선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들. 그 결과로 주어지는 작은 성취를 하나씩 쌓아가며 큰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 한복판에서 또는 저 끝 변두리에서 자기 신념을 현실로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매스와 무난, 엣지와 니치, 직관과 느낌이 어우러지는 세계로 돌아왔다. 그래. 어쩌면 내가 너무 삐뚤게 생각한 걸지도 몰라. 실제로 미치고 팔짝 뛰진 않았지만 그런 상상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분명 길이 있을 텐데 난 안 될거야, 라며 포기한 걸지도(해보긴 해봤어?). 그래. 나라고 시장을 선도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네? 음, 뭐라고요? 좋긴 한데 베스트는 아니라고요? 아... 저 방금 한 말 취소하겠습니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성공한 1%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네요. (21.02.03)
갈팡질팡, 혼란, 떨림 이런 것들은 모두 건강함의 상징인 거 같아요. 직장 상사로부터 애매모호하고 앞뒤가 안 맞는 오더를 받으면 몸이 떨리고, 그 오더대로 결과물을 만들어 갔는데 정반대의 피드백을 받으면 치가 떨리죠. 더 좋은 예도 있어요. 고백할 때 우리 몸은 떨리잖아요. 고백에 성공하면 더 떨리고요(이번에도 치가 떨리나요?)
웃자고 한 얘기지만 나침반의 바늘도 항상 북쪽을 가리키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어떻게 보면 직장에서의 프로젝트도, 우리가 사는 사회도 집중된 한 점으로 성큼성큼 다가간다기보다는 두 축을 놓고 이랬다저랬다 갈팡질팡하는 거 같아요. 이게 맞나? 저게 맞나? 이게 아니네? 그럼 저건가? 하면서 고민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밀고 나아가는 그 태도야 말로 가장 좋은 한 점이고, 더 좋은 선택지에 가닿도록 도와주는 힘 인거 같아요. 달리 말하자면 모순됨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아이디어와 선의를 추동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아매오님의 떨림이라면 매스와 무난, 엣지와 니치를 뚫고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항상 파이팅입니다! 기억하세요, 제일 좋은 떨림은 고백!
대중적인 것과 힙한 것은 서로 배척하는 영역이 아니라 동일한 눈금자 위의 표시라고 생각해요. 그 사이 어디에 위치할지를 매번 개인의 감에 맡기기보단 명확한 기준을 꾸려놓은 조직에서 일할 수 있다면 큰 복이겠죠.
그런데 기자 스터디에서 아매오님이 받았다는 피드백은 좀 당황스럽네요. 기자를 준비하는 사람이 서비스 기획자와 비슷한 시각에서 ‘아이템’을 다룬다는 점에서요. 저는 둘은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서요. 아무리 사람들 귀에 익은 이야기라도 기자가 다루는 건 클릭 유도 목적의 텍스트 다발 이전에 현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인데, 신선하지 않아서 아쉽다니...저라면 피드백에 ‘콘텐츠 마케터와 기자의 차이를 잠시 간과한 것 같아 아쉬움’이라고 다시 피드백을 남겼을 것 같아요. 기자 스터디라는 모임의 정체성을 위해서라도요.
'새로운 것 좀 해봅시다'라고 말하는 작자들을 상대로 아이디어를 내면 '이건 너무 새로운데'라며 난색을 표하곤 하죠. 낯설지만 익숙한 것. 신선하면서도 올드한 것. 이 얼척없는 피드백을 받고 나면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건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하지만 당장의 성과를 내야만 하는 관리자의 입장을 생각하면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해요. 새로운 걸 해보겠다며 나섰다가 비용만 축내고 나면, 당장 모가지가 위태해질 수도 있으니까요. 날마다 혁신을 울부짖는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들도 매년 자가복제를 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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