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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젊은 날밤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7.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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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야망백수

 

 

어젠 밤을 새웠다. 대학생 때야 술도 먹고 연애도 하고 게임도 하고 과제도 하려니 밤을 새우는 일이 빈번했지만 짧은 직장 생활을 거쳐 안온한 백수의 삶에 접어든 이후로는 처음 세우는 밤이다. 사실 밤을 새우는 건 고정 수익이 없는 백수에겐 적잖이 사치스러운 일이다. 잠의 효능-잠이 보약이다-을 누리지 못할뿐더러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세상에서 활동 시간이 길어지는 것은 불필요한 소비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자는 동안엔 돈을 못쓴다. 그러므로 매일 푹 자야 한다. 나의 24시간을 경제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우수' 등급을 받을만한 시간은 자는 시간이 유일할 것이다.

엊그제 저녁에 친구와 새로 생긴 와인바에서 젊음과 힘이 느껴진다는 설명의 스페인산 싸구려 와인을 마시고 있을 때만 해도 밤을 새우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젊음과 힘이 느껴진다는 스페인 와인은 한 병에 3만 원 정도 했는데 공갈 코르크로 밀봉되어 있었다. 불문학을 전공한 친구는 공갈 코르크를 쓰는 와인이 3만 원이 넘는다는 건 사기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우리는 1년에 한 번 정도 만나는 사이인데 작년에 만났을 때도 와인을 사 먹었다. 그때도 비슷한 와인을 비슷한 돈을 주고 사 먹었는데 그때는 즐겁게 마시다가 올해는 분통을 터트리는 걸 보면 1년 사이에 친구의 식견에 엄청난 발전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아닌 게 아니라 친구는 이제 제법 사회인 티가 났다. 안주를 시키고 술을 시키는데 거침이 없었다. 그 거침없는 태도는 '나 이제 돈 좀 번다'라는 생각이 없인 나올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식견을 이야기하다가 돈을 쓰는 품을 연결 지어 말하는 것이 속물 같긴 하지만 어떤 면에선 둘은 동의어이기도 하다.

친구의 관심사는 차였다. 요즘 뭘 타냐고 해서 나는 주로 벨로라인 클라우드를 탄다고 했다. 벨로라인 클라우드는 내가 타는 자전거의 모델명이다. 왜 면허도 있는데 운전을 안 하냐고 물어서 잠시 생각해봤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주차를 할 자신이 없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골목길이며 주차장이며 하는 공간에 비집고 들어가 그만큼의 공간을 당당하게 주장하는 짓거리를 할 자신도 없거니와 마음이 없다. 나는 딱 자전거만큼의 공간만 쓰면서 살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요즘 이 자전거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배달을 해서 새로 구한 작업실의 월세를 낼만큼은 번다고 자랑도 했다. 잘나가는 사람들의 용어로 풀자면 '수익 파이프라인'이 하나 생긴 셈이다. 나의 자전거 사랑을 듣자 친구는 넌 아직 청춘이구나라고 했다. 청춘이라는 화두는 내가 늘 마음에 품고 다니며 고민하는 화두다. 나는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는데 친구들은 내게 넌 아직 청춘이구나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우월감과 부러움을 동시에 담고 있는 말인 걸 알지만 나도 열등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끼기에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마침 마시고 있는 와인이 싸구려긴 하지만 젊음과 힘이 느껴지는 와인이라니까 이거나 부지런히 마시자고 했다.

구두약 냄새가 올라오는 스페인산 와인을 거의 다 비워갈 무렵 나의 수익 파이프라인 중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클라이언트는 마케팅 에이전시의 에디터인데 급한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꽤나 쏠쏠한 알바를 제안하곤 한다. 이미 밤이 깊었는데 밤에 혹시 시간이 되면 인터뷰 녹취를 푸는 알바를 할 수 있냐고 했다. 다양한 수익 파이프라인을 갖고 있는 프리랜서의 기분을 한번 느껴보려고 하겠다고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친구는 젊음과 힘이 느껴지는 와인에 취했는지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 일을 받아서 슬슬 들어가 보겠다고 했더니 우리 이렇게 보는 게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아쉽다고 한 잔 더 하자고 한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모든 순간을 마지막처럼 살겠다는 철모르던 긍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서 느껴지는 설득력이었다. 넌 아직 청춘이구나. 우리가 보는 게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동갑내기 친구의 조로한 대사는 마지막 전투를 앞둔 노병의 그것 같아서 거절할 수 없었고 우리는 3시까지 술을 마시다 급기야는 피시방에 가서 게임도 몇 판 했다. 모든 게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몇 년 전의 루틴대로.

집에 돌아와서 졸음과 싸우며 녹취록을 풀었다. 두세 시간이면 끝낼 일인데 피곤해서 인터뷰이의 말이 도통 한 번에 들리지가 않았다. 일을 완전히 마쳤을 땐 아침 아홉시였다. 넌 아직 청춘이구나라는 친구의 말이 내게 무슨 신통함을 부린 것인지 자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자면 영영 청춘이길 포기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오후 2시엔 사이드 프로젝트를 같이 하는 친구와 회의를 하기로 했고 밤 10시 반엔 집 근처 독서실을 청소하는 알바를 하기로 했다. 이 모든 일정을 마치면 새벽 한시 반이 될 것이다. 어제 친구와 와인을 마신 일은 돈이 안되는 일이고 녹취록 푸는 알바는 돈이 되는 일이다. 오후의 사이드 프로젝트 회의는 돈이 안되는 일이고 독서실 청소는 돈이 되는 일이다. 0과 1이 반복되는 하루다. 0과 1로만 이루어진 디지털 세상에선 청춘,조로, 젊음과 힘, 와인, 피곤 같은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의미없다. 이 디지털 코드 같은 하루는 21세기를 사는 초인들의 생활패턴이다. 깨지지 않은 패턴에선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이 아름다움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루 종일 몸을 움직였다. 독서실 청소를 마치고 겨우 집으로 돌아와 여태 읽지 않은 친구의 카톡에 답했다. 나 이러저러한 하루를 마치고 들어왔다. 너랑 와인을 마신 게 먼 과거의 일 같다. 친구가 답했다. 넌 역시 아직 젊구나.(20.01.20)

 

 

 


마감도비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문장을 읽은 거 같아요. 대한민국엔 조로(早老)의 광풍이 분다고. 반대로 생각하면 일찍 늙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자기와는 다른 사람이 젊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겠죠. 한편으론 이렇게 사는 게 지치고 피로한데 늙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겠죠. 조로와 피로의 악순환이라고 할까요.

  어쩌면 "너는 아직 젊구나"라는 말은 그 악순환에 갇히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부끄러움은 젊음에 대한 칭찬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 세상의 몫이라는 생각을 해요. 

 

 

아매오


다이나믹 듀오 5집 수록곡 ‘청춘’을 들었을 때 저는 고작 열일곱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체 성장도 멈추지 않은 나이에 왜 그렇게 이 노래의 가사를 곱씹었는지 모르겠어요. 흘러간 청춘을 바라보는 자조적 시선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었을 텐데 말이죠.

  뭐 어쨌든, 야망백수님이 내뱉었다는 “나 이러저러한 하루를 마치고 들어왔다. 너랑 와인을 마신 게 먼 과거의 일 같다.”라는 말이 꼭 청춘의 끄트머리에서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사람의 말인 것 같기도 해서 또 곱씹어보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열일곱이 아니라 스물아홉이지만요(사실 이것도 어리다고 하는 분들이 계시겠죠? 그래도 봐주세요. 저 열일곱에도 이랬다니까요?)

 

파주

최근 술자리를 가진 뒤에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술을 한번 마시면 30시간이 지나야 회복되는 몸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겨우 한 해가 지났을 뿐인데, 나이를 먹으면 시간에도 가속도가 붙는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이렇게 금방 체감할 줄 몰랐네요.

  뭔가 방향을 잃었다 싶을 때 <이별택시>의 가사를 농담 삼아 내뱉곤 했는데, 그게 진담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점점 더 조급해지는 건 한정된 시간 동안 뭐라도 해내야 할 것 같은 마음 때문이겠죠? 무거워진 몸도 몸이지만, 그런 조급함이 더욱 시간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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