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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고에 감사해주세요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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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마감도비

 

학익진 전술을 펼칠 예정이었다. 연봉 협상을 임하는 나의 자세였다. 연차는 아직 보잘 것 없으나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성과가 남아있습니다!

지난 연말 연봉협상 일자와 시간이 확정된 이후, 긴장과 설렘이 뒤섞인 시간을 보냈다. 어느만큼 큰 의미로 다가왔느냐 하면 자다가 연봉협상 하는 꿈을 꿀 정도였다.

참고로 통보가 아닌 연봉 협상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감도비의 인생 주마등을 함께 훑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간단히 말하자면, 마감도비는 지난 2년간의 스타트업(의 탈을 쓴 좋소!)의 삶을 마치고 이제 막 조금 더 큰 회사로 이직한 참이었다.

첫 직장이었던 이전 회사는 연봉 협상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 같았다. 알면서 모르는 척 했겠지. 해가 바뀌고 연봉협상을 요청하자 협상권을 쥐고 있던 인간(편의상 그 사람이라고 하자)은 바닥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한번 젖혀서 천장을 쓱 보더니 돌연 창밖을 보는 것이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 사람 머리를 조이스틱 마냥 마구 휘두르는 건 줄 알았다.(그 손은 아마 자본주의였으리.)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돌아온 말은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것이었고 나는 흔쾌히 알겠노라고 했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해하고 말고.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하는 그 절절함에 힘입어 나는 야근을 마치고도 너끈히 경력기술서와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었다.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무튼, 2021년으로 다시 돌아와, 인고의 시간을 견딘 나, 마감도비는 당당하게 연봉 협상에 성공할 꿈을 꾸고 있었다. 정성껏 준비했다. 2020년 내가 거둔 성과가 어느 정도며 업계에서 같은 연차의 평균 연봉은 얼마며, 동종 업계의 근황은 어떠한지 밤마다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더욱이 지금까지 지각 한번 없었음은 물론이고 마감을 못 지킨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간 회사에서 보였던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정성껏 귀담아 들을 때의 내 모습(‘가오나시’를 떠올리면 된다)을 감안하면. 근태 또한 더할 나위 없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콘텐츠로 먹고 사는 직업이다 보니 오히려 지난 일 년 간의 성과는 가시화하기 쉬웠다. 클릭 수, 클릭 수, 클릭 수. 그간의 트래픽을 몽땅 긁어 엑셀에 버무렸다. 결과값은?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조금 자신 있었다.(그렇다. 이미 나는 첫 단추를 잘못 꾀고 있었던 것이다. 철이 없었죠.. 그런 꿈을 꾸다니..)

드디어 결전의 날, 망설임 없이 회의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대표와의 면담은 특별히 어색할 것이 없었다. 원래 어색했으니까. 그래도 앉은 자리에서 곧바로 돈 얘기로 넘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소소한 잡담이 오갔다.

그리고 대표가 입을 열기 시작했는데. 그때야 깨달았다. 이것은 연봉(을 재조정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연봉(을 통보하는 것에 대해서 작고 하찮은 나의 의견을 한 번 들어나 보기 위한) 협상임을.

열심히 준비해간 내 의견과 제안, 영혼까지 끌어모은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전에 이미 협상의 저울은 기울고 있었다. 서로의 카드를 하나씩 뒤집어 보여 줄 때마다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퇴로만 점점 좁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 싶어서 한참 동안 언변을 토했더니 어느새 나에게 할당된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못한 채 회의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머릿속은 온갖 의문의 형태를 띤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

너무 기대가 컸나. 내가 나의 열심을 알아달라고 했나, 내가 얼마나 힘든지, 내가 얼마나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에 대한 나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알아달라고 했나, 아닌데. 격무에 시달리는 사람일수록 연봉 협상에서 자신의 노고를 앞세워 협상을 그르치기 싶다는 점은 충분히 숙지하고 간 터였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나는 정정당당한 내 성과를 가지고 협상에 임한 거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인생은 실전인가? 실전? 내가 그동안 일한 건 실전이 아니었나? 한 쪽은 가혹한데 왜 다른 한 쪽은 관대해야 하지? 등등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차분히 생각 정리를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회사를 빠져 나와 술을 마시러 갔다. (음?)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그 당시에는 뭐라도 마셔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낮에도 술을 파는 회사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그런데 코로나19 QR코드를 찍고 메뉴를 골라 주문하려던 찰나에(블랙 러시안을 마시려고 했다) 회사 전화를 한통 받았다. “OO아, 대표님께서 잠깐 보자시네.”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다시 회의실로. 우리의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으로.

그 뒤에 어떻게 됐느냐고? 음,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리 만족스럽진 못했다. 회사와 나는 자구책을 찾았지만 적어도 ‘윈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난 지금, 그날의 기억은 해프닝으로 남았지만 그날 느꼈던 감정은 가슴 한편에 남아있다.

가장 속상했던 건 협상에 실패했다거나, 냉정한 말을 들었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더 잘했었다면, 내가 더 잘나고 더 똑똑해서 좋은 직장에 갔었더라면, 이라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있었다는 게 나에게는 가장 뼈아픈 실패로 남아있다. 나는 나 자신과의 협상에도 만족스러운 답을 받아내지 못한 셈이다.

연봉 협상은 원래 그런 거라고, 사회는 성과를 쉽게 인정해주지 않는 곳이라고 말하기에는 우리의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는 너무나 값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급 명세서에 적혀있는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라는 멘트가 진심으로 느껴지는 날은 언제쯤 올까. 오긴 올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부와 명예를.(21.02.10)


 

아매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연봉협상에 임하는 제가 조언을 구한 사람들에게 들었던 공통된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은 다들 잘 늘어놓더라고요. 근데 맞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바보같이. 그치만 어쩌겠어요. 실제로 아마추어였는데.

아마추어 눈에도 보일 건 보이죠. 자세한 내용을 밝히긴 어렵지만, 제안을 듣고 저는 제 귀를 의심했답니다. 그치만 당당한 척 못하는 K-겸손러인 저는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라고 소리치기 보다는 '다 내가 부족한 탓이지...'라며 제 탓을 합니다.

이직을 했어요. 이곳의 연봉도 사실 그렇게 맘에 들진 않는데…다 제가 부족한 탓이겠죠… 그치만 신입 지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전 직장에서 제안한 연봉보다 높았어요. 웃기더라고요. 허탈했고요. 참. 저는 은퇴할 때까지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라는 소리 들을 거 같아요.

 

야망백수


연봉협상 시즌에 시작된 저의 신입시절이 떠오르네요. 선배 팀원들이 풍기던 그 집단적인 자조와 체념의 냄새가 저는 참 의아했어요. 왜 나보다 2배는 능력있어보이고, 10배는 열심히 일하는 저들이 패잔병의 냄새를 풍겨야할까? 참을성 없는 저는 그렇게 되는 게 두려워서 연봉협상을 한번 하기도 전에 탈주해버렸답니다.

근데 탈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게 아니더군요.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는 말이 참말이었어요. 저는 전선만 회사가 아니라 다른 곳으로 옮겼을 뿐 매일 쳐맞고 패하고 있습니다.(고단허네요) 맞다보니까 이제서야 모두에겐 패배를 견디면서도 계속 해야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란걸 어렴풋이나마 느끼는 중입니다. 이걸 또 피하려고만 든다면...저는 야망백수가 아니라 도망백수일 뿐이겠죠. 쓴맛을 느끼면서도 앞으로 계속 나가는 모든 풀칠러님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바칩니다. 전투에선 지더라도 전쟁에선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풀칠러에게 영광을!

 

파주

돈 얘기를 껄끄럽게 생각하는 양반놈들의 문화가 이 시대 사람들의 연봉협상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네요. 나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 뿐인데 어째서 연봉협상은 항상 민망하고 어색한 자리가 되는 걸까요.

직장인의 사례와는 다를 수 있지만요.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남궁민 배우가 연기한) 백승수 단장은 베테랑 선수의 연봉 삭감을 감행하면서 이렇게 말하죠. "자기도 모르는 자기 가치를 우리가 왜 인정해 줍니까?" 직장인들의 연봉을 사정없이 후려치기 하는 사장님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저는 이미 늦었는지 모르지만요. 스스로가 조금 뻔뻔하다고 느껴지더라도 가진 능력을 빰핑하는 습관을 기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풀칠러 여러분 모두 다가올 연봉협상 시즌에는 작은 승리라도 쟁취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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