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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행운을 기원합니다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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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아매오

 

 2017년 3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나는 기자 지망생이었다. 가고 싶었던 언론사에서 두 번째 최종 탈락 통보를 받고 나니 이 길을 더 고집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로 모두 정리했다. 함께 공부하던 스터디원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간 날 A와 나눈 대화가 유독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이제 뭐할 거예요?”
“모르겠어요. 일단 놀게요. 연말이기도 하고, 취준한다고 여태까지 제대로 놀지도 못했으니까.”
“아니, 뭘 몰라요. 계획 없어요?”
“없어요. 일단 놀고 생각해보려고요.”
“아니, 진짜 없다고요?”
“네. 진짜 없어요”
“진짜요?”
“진짜요.”

 싸운 건 아니었다. A는 굉장히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을 닮은 날카로운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A가 그렇게 당황 혹은 황당한 감정을 그대로 내비친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험이라는 게, 취업 준비라는 게, 결국엔 자기 자존감 깎아 먹으면서 버티는 싸움인데, 나도 참 자존감 높은 사람인데, 그런데도 이게 참 쉽지가 않네요.”

 ‘이제 더 이상 깎아 먹을 자존감이 남지 않았소’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다른 스터디원들의 사기마저 꺾을까 꾹 참았다. 어쨌거나 당시 나는 계속되는 낙방에 멘탈이 터진 중도 탈락자였고 혹시라도 그 이미지가 다른 스터디원들이 그리는 자신의 미래에 유리조각처럼 파고들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최대한 긍정적인 뒷모습을 남기려 했다. 후회도 미련도 걱정도 없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헤어졌다. 실제로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나머지 둘은 지금도 그 흔적이 보일 만큼 컸다.

 ‘GV 빌런 고태경’ 초반부를 읽으며 정말 많은 문장에 밑줄을 쳤다. 이를테면 “실패한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같은 문장. 또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손에 잡힐 듯하다 멀어지고 반복하다 보면 결국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게 돼.” 같은 문장이나 “너무 오래 추구한 꿈이 환상을 만든 건 아닐까.” 같은 문장. 그러면서 깨달았다. 나는 지망생이라는 신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실패한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라는 질문에 “여기 있잖아…”라며 홀로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사람이 돼 버렸다는 걸. 어쩌면 그 마음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걸.

언론인 지망생 커뮤니티인 다음 카페 아랑에 올렸던 후기를 다시 읽어봤다. 신세 지던 친구 집에서 짐을 빼 고향으로 내려가는 기차에서 썼던 글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글은 실패담입니다.”라며 시작한다. 똑같은 삶을 살아도 성공한 사람에게는 성공의 이유가, 실패한 사람에게는 실패한 이유가 되기 마련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문장이었다. 그런데 고태경은 그러지 말라고 얘기한다.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실패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쭉 나 자신을 비웃고 미워했다. 오랫동안 추구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것, 당시에는 유예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영영 잃어버린 것들이 지망생이라는 신분으로 남아 나를 괴롭혔다. 때문에 그 후기는 앞으로도 계속 실패담으로 남아 있을 운명이었다. 주인공인 나는 영원히 실패자였을 것이고. 그러다가 얼마 전에 이 문장을 만났다.

“패배를 실패로 착각해선 안 된다. 패배가 상대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라면 실패는 나와의 싸움에서 진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졌다면 실패한 게 아니다. 패배한 것이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겼다면 그건 실패한 것이다. 말장난이 아니다. 성공이냐, 실패냐를 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누구도 나 대신 실패라고 말할 권리는 없다.”

- 권석천, 『사람에 대한 예의』, 「지더라도 개기면 달라지는 것들」

 패배했다고 실패한 건 아니다. 나는 패배의 순간마다 실패를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실패나 성공은 무언가를 뒤돌아 본 뒤 내리는 평가의 언어다. 이젠 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크고 작은 승리와 패배를 쌓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51 대 49로 승패가 갈릴 때는 승리만큼 패배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게 다 패배와 실패를 구별하는 틀을 얻은 덕이다. 권석천 기자는 말장난이 아니라고 했지만, 말장난이면 어때. 원래 말장난 속에 통찰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살면서 자주 패배한다. 승리로만 점철된 성공한 삶이란 판타지다. 하다못해 메시조차 월드컵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바로 얼마 전에도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팀이 8:2로 박살나는 걸 지켜만 봐야 했다. 메시는 실패자인가? 그럴 리가. 그는 여전히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다. 심지어 지난 시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최다 득점, 최다 도움, 최다 공격포인트, 최다 슈팅을 모두 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차곡차곡 승리와 패배를 쌓아왔다.

 두 번이나 최종 탈락의 고배를 마신 ‘가고 싶었던 언론사’는 전형마다 문자를 통해 결과와 다음 일정을 안내했다. 그 문자의 마지막 문장은 항상 “여러분의 행운을 기원합니다.”였다. 묘했다. 무엇보다 공정해야 하고 근거가 확실해야 할 공채 경쟁에서 굳이 지원자의 행운을 빌다니. 하지만 현재 나는 이 문장을 다른 의미로 읽는다. 승리하거나 패배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다. 나의 승리가 온전히 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게 아닌 것처럼 나의 패배도 온전히 나의 무능력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한다. 한 시절이 끝나는 자리에서 또 다른 시절이 시작된다. 삶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마감도비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말라는 문장이 무척이나 인상적이네요. 다소 삭막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저에게 유용한 충고가 아닐까 합니다. 실패, 참 무서운 단어죠. 너무 단호하고 차가운 말이라 앞뒤에 미사여구를 허락하지 않는 거 같아요. 그래도 아매오님이 행운을 기원해준 덕분에 조금은 기운이 났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구나, 비록 하루하루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패배하고 있지만 아직 실패는 아니구나 하구요. 제가 좋아하는 저널리스트는 세상이 가장 어두운 시절을 지날 때 늘 다음과 같은 멘트로 뉴스를 마쳤다고 해요. "Good night, and good luck!" 고마운 위로를 전해준 아매오님에게도, 이 글을 읽고 있을 누군가에게도. 굿나잇 앤 굿럭입니다.

 

 

파주


저 또한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제 인생이 이미 충분히 X돼서 돌이킬 수 없다고 믿었던 날들이요. 매 출근길마다 도대체 나는 무슨 업보가 있길래 요 모냥 요 꼴이지 싶었습니다. 그렇게 무심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주말 방청소를 하다가 스물 네 살에 쓴 일기장을 발견했어요. 세상살이에 슬픔이 그리 많았는지 원, 짠내 가득한 일기에는 '이제 내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것뿐'이라는 개소리가 적혀있더라고요. 세상에, 인생이 제멋대로 흐른다고만 생각했는데 몇 년 전 목표를 얼렁뚱땅 이루게 된 거죠.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결론은 적어도 삶에서 100%의 승리도, 패배도 없다는 겁니다. 살다 보니 승리도 하고, 패배도 하게 되는 거겠죠. 성공과 실패는 나이를 더 먹은 다음에 묻기로 합시다, 우리.

 

야망백수


아매오님의 글...게으른 백수인 제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네요. ‘패배도 많이 하는 와중에 실패까지 하려고? 행운을 빌어주마! 움직여!’ 뼈 때리는 채찍과 행운 당근...근데 전 너무 게을러졌나봐요. 채찍도 당근도 싫어졌나봐요. 허허. 저는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싶답니다. 경쟁과 강박을 초월하고 싶다고 바꿔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냥 그날 그날의 쾌락과 풀칠-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 최소한의 물적 토대-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요. 이런 저, 정상인가요? 아아. 정상과 비정상의 개념도 초월하고 싶다. 아무래도 내년 쯤엔 어디 산에 들어가서 살고 있을 것 같네요. 놀러오세요 야망백수의 산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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