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 파주
#1
유독 시즌마다 꽂히는 단어가 있다. 말이 한 번 머리에 각인되면 전두엽 어딘가를 헤집고 다니는 모양인지, 다섯 마디를 뱉을 때마다 버릇처럼 특정 단어가 튀어나오곤 한다. 작년에는 ‘이를테면’이 입에 붙는 바람에 고역을 겪었다. 대화를 잘 마무리해놓고서 엉뚱한 타이밍에 입버릇이 터져 나오면 어영부영 대화를 다시 이어 붙여야 했다. 그렇게 재개된 대화를 수습하려고 얼토당토않은 예시를 늘어놓은 적이 많았고, 그런 날이면 잠들기 전까지 침대 매트를 사정없이 내리치곤 했다.
최근에는 ‘이를테면’에서 벗어나 ‘생산성’에 빠졌다. 출근길의 생산성부터 점심시간의 생산성과 비타민D의 생산성, 수면의 생산성까지 아무 말에나 ‘생산성’을 갖다 붙이면 어쩐지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중에서도 생산성과 찰떡같이 달라붙는 건 역시나 업무와 관련된 단어였다. 이른 출근의 생산성, 집중근무의 생산성, 야근의 생산성... 어째서 나는 이 빌어먹을 생산성이라는 늪에 빠지게 된 걸까.
#2
국가에서 인증하는 어른의 증표가 주민등록증이라면, 스스로 생각했던 진짜(진짜 최종.hwp) 어른의 기준점은 서른이었다. 공자는 서른을 두고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이’라고 하던데 어째 내 경우에는 나이를 먹을수록 뱃살만 늘고 마음은 치졸해지는 모양이다.
고작 몇 년 전만 해도 곁에서 궁상을 떨던 친구들이 밥벌이를 시작하더니 곱절도 더 되는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을 듣고 난 뒤부터였을까. 더 짧은 시간을 근무하고 더 많은 돈을 쥐는 그들에게 자주 부러움을 느꼈고 쉽게 조급함을 느꼈다. 어떤 날은 주먹구구식으로 손가락셈을 해보기도 했다. 이대로 나이를 먹으면 종래에는 아파트 한 채의 소유 여부가 갈라지지 않을까. 나의 작고 귀여운 연봉과 타인의 듬직한 연봉을 비교해 보니, 내가 저 사람과 같은 시간을 사는 것인지 도통 실감 나질 않았다. 직장에 있는 시간은 더 긴데 보상은 턱없이 적다니. 이거야말로 시간을 생산성 없이 쓰고 있는 삶이 아닌가.
생산성은 비단 연봉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직장동료는 아침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해치우고 미련 없이 집으로 향했다. 어제 해야할 일을 미처 쳐내지 못하고 하염없이 업무를 늘리는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루분의 일을 여유 있게 뚝딱 끝내고 가는 선배의 당당한 뒤태를 볼 때, 이것이 바로 레벨(생산성)의 차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생산성에 욕심이 났다. 조금 더 많은 연봉, 조금 더 빠른 퇴근을 쟁취하기 위해서.
#3
유튜브에 ‘생산성’을 검색하니 생산성을 높이는 습관부터 집중력 향상을 위한 마인드컨트롤, 생산성에 도움을 주는 각종 앱과 필기도구까지 각양각색의 영상이 튀어나왔다. 그중에서 조회 수가 높은 영상 몇 개를 재생해 보고 스스로 고수라 자칭하는 작가의 책도 찾아 읽었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생산성을 높이려면 정리정돈을 잘하라, 주어진 시간에 일을 부지런히 처리하라,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성장하라 등 당연한 말만 남발하고 있었으니까. 누가 이걸 몰라서 고민하나? 다들 알면서도 못하는 거지. 요즘 트렌드한 직장인들은 다 쓴다는 ‘힙한 앱’ 노션에도 도전해 봤지만 생산성은커녕 온라인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용도로 전락하고 말았다.
몇 달 동안 고민을 거듭한 생산성 추격기는 의외의 지점에서 간단히 해결됐다. 소속된 부서를 관리하는 상사는 하반기를 맞아 사업계획 점검에 나섰고, 생산성이 턱없이 부족한 이 놈팽이를 어떻게든 굴려 성과를 만들어야 했다. 상사는 ‘왜 할 수 있는데 안 하느냐’는 말로 당근을 주는 동시에 내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업무를 던져주었다. 대뜸 바다에 떠밀려 생존수영을 익히는 것처럼 살기 위해서는 쉼 없이 발을 굴러야 했다.
생산성 추격기가 처참하게 끝을 보고 나서야 나는 고민의 끝이 곧 문제의 해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퇴근과 퇴사의 갈림길에 서서 집중하지 않으면 집에 갈 수 없는 업무량을 부여받으니, 생산성이고 뭐고 고민할 여력이 없었다. 할당된 업무를 제대로 해치우지 않으면 '파주 씨는 우리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라는 (<쇼미 더 머니> 탈락 방식의) 엄포는 덤이었다. 그러니 어쩔 도리가 있나, 그저 일하고 또 일하는 수밖에. (20.10.21)
In training, you listen to your body. In competition, you tell your body to shut up.
저에게 개똥철학이 하나 있는데 그건 ‘인간은 지치는 존재’라는 거예요. 승진도 좋고 성과도 좋지만 이를 위해서는 우선 지속가능함, 그리고 집중과 휴식을 위한 방법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나 자신을 단련시키고 성장하게 만드는 훈련일지도 모르겠네요. 생산성의 실마리, 같이 찾아보아요 파주님.
덧, 이직 후 늘 저녁 9시에 마무리하던 마감을 요즘은 7시에 할 수 있게 됐어요. 충고와 협박이 섞인 말 때문이었는데요. “제발 업무 시간에 인스타그램 하지 말고 일에 집중해. 일을 빨리 끝내란 말야.” 다른 것도 섞여 있었구요. “그리고 그 시간에 나를 만나.” 생산성은 우리를 기다리는 그 무엇일지도요.
꾸역꾸역 읽었던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떠오릅니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며 한 판 붙고 난 뒤 가슴 속에 남았던 씩씩대는 마음이 떠오르네요. 다행히 머리에도 하나는 남겼어요. 우리가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이유는 지금 이 시대의 생산성이 빌어먹을 만큼 높아져 버린 탓이라는 메시지요. 일용할 양식이면 충분했던 과거와 달리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너무나 많은 걸 만들고 쓰고 버립니다. 내가 그러기 싫어도 남들이 그래요. 그래서 박탈감 or 위기감이 느껴지고요. 그래서 또 생산 전선에 뛰어들게 돼죠. 생산성은 기하급수로 느는데, 내 성장은 산술급수야. 고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결국 미니멀리즘이 힙한 유행으로 머무는 게 아니라 대세 중에 대세가 된다면 현대인의 생산성에 대한 열망을 낮출 수 있지 않을까요. 아아... 이게 뭔 생산성 없는 소리람.
생산성 추격기가 아니라 생산성 격추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일을 빠르게 끝내 더 나은 보상(더 많은 자유시간, 혹은 더 많은 돈)을 얻는 게 생산성 추격의 목적이었을 터인데 일을 더 하게 되셨군요. 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생산성이 올라갔지만 파주님의 입장에선 생산성이 박살난 아이러니. 개인의 이익추구가 집단의 이익추구와 일치되는 유토피아는 역시 어디에도 없나 봅니다그려.
그러나 부디 생산성에 대한 고민만은 놓지 마시길. 생산성에 대한 고민은 곧 내가 일하고 또 일해서 만들어내는 열매를 내가 따먹겠다는 것으로,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니까요. 파주님의 생산성 추격이 다시 한 번 날아오르길 기원합니다. 한 번만 더 날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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