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 마감도비
9월 회사에 인턴 두 명이 출근했다. 인턴이지만 사실상 수습이었다. 늘 막내였던 나에게 회사에 나보다 더 긴장한 사람이 있다는 건 조금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출근 첫날부터 흐리멍덩한 동태 눈깔을 하고 있었던 나와는 달리 두 사람은 아주 맑은 눈을 하고 있었다. 반듯한 옷과 반듯한 자세로 (그리고 아마 그보다도 더 반듯한 생각으로) 각자 할당받은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 날 이후 내가 속한 팀에 인턴 한명이 배정됐다. 뫄뫄 선배가 케어해줄 거라고 얘기를 들었다. 각자 맡아야 할 업무 분야와 루틴이 조금씩 달랐으므로 그 모든 말과 분위기를 나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누군가는 잘 알려주겠지. 나는 내 일을 처리하기에도 너무 바빴다.
인턴들의 첫 출근 이후 일주일 정도 흘렀을까. 그 두 사람은 여전히 가지런하고 반듯했다. 그때도 그러려니 했다. 누구에게나 일종의 꿔다놓은 보릿자루, 이른바 ‘꿔보’ 시기는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같이 회의를 들어가고 정수기 앞에서 마주치면서 그 두 사람의 표정을 마주하는 일이 잦아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난감함과 난처함의 축제 같은 표정을. 사무실을 오며가며 나 스스로에게 드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었다. ‘왜 아무도 기본적인 업무를 제대로 안 알려주는 거지?’
고만고만한 회사들이 그렇듯이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는 다소 고령화된, 다시 말해 중간 연차의 선배가 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인턴들에게 본격적으로 일을 알려줘야 할 시기에 선배들은 너도나도 외근이며 미팅으로 바빴다.
어느 날 지나가다 물어봤다.
“OO씨, 혹시 ▲▲선배한테 인트라넷 쓰는 법 배웠어요?” “아니요.” “OO씨, 혹시 ◇◇선배한테서 회의록 작성하는 법 들은 적 있나요?” “아니요.” 그래서 내가 알려줬다. 누군가는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인턴 한 명이 내 자리에 와서 말했다.
“(편의상)마감도비 선배, 저 이것 좀 도와주세요. ■■선배가 시키신 업무인데 자료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요??’라고 순간 내뱉을 뻔했으나 무표정한 얼굴로 “그래요, 뭐가 잘 안 되나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인턴 자리로 담담히 걸어갔다. 바보 같이, 고생길로.
크건 작건 누군가에게 일을 알려준다는 건 기존의 내 업무 10에 조언 1을 얹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일을 알려준다는 건 전혀 다른 업무 환경에 놓이는 걸 뜻했다. 회의에 들어가기 전 준비해야 할 것에는 무엇이 있는지 일러주고, 보고서(라고 통칭하겠다)에 담고 싶은 의견은 무엇인지 되묻고, 찾을 수 있는 자료가 정말 이게 전부인지 하나하나 살피는 일이 이어졌다.
당황스러웠고 난처했다. 내가 처리해야 할 일로 시간이 부닥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으니까. 내가 직접 처리하는 것보다 답변을 해주는 데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렸다.
솔직히 짜증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이직 삼개월차, 이제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겨우 내 할당량을 다 채우고 커피 한잔에 숨 돌릴 수는 있는 수준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이런 말을 들었다. “보고서 방향 잡아주셔서 감사해요! 도와주신 덕에 수월하게 일을 마쳤어요. 감사합니다.”
오. 화면 속 메신저를 보면서 뛸 듯이 기쁘다거나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다만, “고생했어요”라고 메신저를 보내고 속으로 ‘음~’하고 기지개를 한번 펴게 되는, 딱 그만큼의 뿌듯함은 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회사에서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감각이었다.
반쪽 자리 사수인 내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가끔 하곤 했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도움은 되나? 제대로 알려주고 있는 게 맞나? 잘못 알려주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두려운 마음도 든다.
그럼에도 내가 알고 있는 건 그 두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잘 적응하고 있으며 내가 모자란 가이드라인을 전해주면 그들 스스로 더욱 잘 해쳐나갈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선배인 듯 동료인 듯. 그러고 보면 결국 사수가 해줄 수 있는 건 일종의 섭동 같은 게 아닌가 싶다. 스스로 배우는 사람이 스스로 배우는 사람에게 가하는 자극 같은 것. 나만의 ‘사수론’이다.
그리고 모두가 처음부터 누군가의 사수였던 건 아니니까. 오늘도 사수가 되어가는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다.
부사수가 첫 출근하는 날, 뭐랄까, 무서웠어요. 애송이가 슈퍼 애송이에게 뭘 가르치겠어요. 끽해야 하루이틀 먼저 입주해 콘센트 위치나 와이파이 비밀번호 같은 걸 일러주는 기숙사 룸메 정도였을 텐데. 다시 생각하니 더 기가 차네요. 참내. 아오, 갑자기 쪽팔리네. 무슨 수를 써도 내가 지금 가진 것 이상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무서움(쪽팔림)은 어쩔 수 없이 보편적인 정서가 아닐까 싶어요. 부사수로서 내가 원했던 사수의 모습을 나 자신이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사실이 너무너무 잘 느껴진다는 점에서 괴롭기도 할 테고. 제 부사수는 제가 가진 모든 걸 빼먹었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요. 오히려 기쁨이 더 클 것 같군요. 아, 이게 내리사랑의 한 형태인가 싶기도 하네요.
항상 부서 내 막내만 하다가 취업전선에서 탈주해버린 저로서는 겪어본 적도, 앞으로 겪을 것 같지도 않은 경험이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는 요즘 혼자 이것저것 도전하고 있는데 진짜 스승님이 너무 절실해요. 진짜 스승님만 구할 수 있다면 회사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라니까요? 그래서인지 마감도비님 에세이 속 신입사원님들이 부럽네요. 마감도비님같은 사수를 만났다는 게,,,회사는 학원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서로서로 많이 가르쳐주고 잘 배우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가르쳐주는 사람은 월급받으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플러스 알파, 배우는 사람은 월급도 받고 성장하니 꿩먹고 알먹고. 휴. 부럽다. 오늘도 퇴사를 후회하진 않지만 조직에는 속하고 싶은 이중성 때문에 괴롭네요. 스승님 구합니다.
사수를 주제로 한 글을 읽으니 제가 겪어온 사수들이 절로 떠오릅니다. 회사라는 조직으로 한정 짓는다면 저는 지금까지 3명의 사수를 만났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꽤 사수복이 좋은 편이네요. 제각기 성격은 달랐지만 모두 유능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거든요. 어떤 사수는 정확한 말로 일하는 방식을 일러주기도 했고, 또 다른 사수는 친구처럼 아웅다웅하면서 일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특정한 성격이나 방식이 바람직하다는 건 아니지만, 좋은 사람이 곧 좋은 상사, 좋은 사수가 될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거쳐온 3명의 상사 모두 좋은 사람들이기도 했고요. 진심으로 '좋은 사수란 무엇인가'를 깊게 고민하는 마감도비 님의 모습을 보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은근한 믿음이 생기네요.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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