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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퇴사가 결정됐다. 어쩌면 어제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7.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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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아매오

 

퇴사한다.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는 시대다, 라는 말조차 식상하기 그지 없는 시대인데다 놓는답시고 놓는 한줌이 대단한 기회비용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보니 사실 그렇게 유난 떨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한 시절이 저무는 순간을 지켜보는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조금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어떤 모양과 성질의 경험으로 쌓일지 지금 당장 알 길은 없으나, 그것이 내게 남긴 무언가를 잔잔하면서도 길게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노을을 보며 하루의 여운을 느끼듯이. 물론 버티다 버티다 못 버텨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원래 결정을 내리는 데 오래 걸리는 타입은 아니다. 이번에도 그랬다. 금요일에 풀칠 멤버들과 '계속하고 싶은 일'과 '계속 다닐 만한 회사'에 대한 이야기 나눴고 주말을 혼자 보내며 고민한 뒤 월요일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차우진 님의 글을 읽으며 퇴사하기로 마음 먹었다. 유료 뉴스레터이기 때문에 링크를 걸거나 전문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인상 깊었던 문장 몇 개를 써본다.

“그런데 조금 관점을 다르게 하면, 그러니까 저를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기획하는 사람’이나 ‘글을 토대로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면 조금 애매해져요. 그래서 키워드가 ‘성장’과 ‘불안’인 것 같아요.”

“제게 ‘지속적인 성장’이란 다르게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게 ‘정체된 느낌’은 곧 식상한 관점과 표현이 나올 때에요.”

“글이란 생각과 관점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곧 정체성의 문제고, 그건 내 위치와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보는데요.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은 계속해서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정의가 매번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스스로 그걸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에 이 불안감은 나의 정체성과 동일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 차우진, 숨참 뉴스레터, 시간과 공간의 방에서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점심시간, 동료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한 뒤 상사에게도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물론 이 레터를 쓰고 있는 지금도 가족들은 모른다.


다들 궁금해하는 건 나의 넥스트였다. 이 시국에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리 당당하게 퇴사를 결정한 거겠지. 하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최대한 공백 없이 이직하는 걸 목표로 이제 열심히 지원해봐야죠…

술자리는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은 결핍을 남기고 끝난다.

-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몇 번이나 인용했고 그만큼 많이 읽었으며 더 자주 떠올렸던 문장이다. 가장 아끼는 문장이기도 하다. 왜 아끼냐고? 내가 사람 다음으로 좋아하는 두 가지가 술과 글이라서. 그런 의미에서 이 문장은 완벽하게 아름답다. 얼핏 보면 술자리에 대해 쓴 글이지만 실은 그것이 인생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장을 주로 편지에 쓰곤 했다. 수신인은 대개 삶의 한 시절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졸업하는 후배, 이별한 친구, 퇴사하는 동료… 디테일은 달랐지만 담긴 의미는 비슷했다. 치열하게 ‘다음’을 고민하되, 걱정에 잠기지 말 것. 때로 예상치 못한 불운이 불행을 불러오더라도 늘 자신의 마음을 소중하게 가꿀 것. 보면 알겠지만 사실 이건 나 자신을 향한 메시지였다.

시절과 시절이 교차하는 곳에 서 있는 누구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숱하게 있었다. 매일 밤 마주해야 했던 불 꺼진 방은 침대만큼 좁았고 우주만큼 고독했다. 매일 좁아졌고 그만큼 매일 고독해졌다. 계획을 세우는 속도보다 그것이 무너지는 속도가 언제나 더 빨랐다. 20대의 미숙한 경험과 통찰에서 비롯되는 계획은 거의 대부분 이뤄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쓰레기라는 문장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내 생각엔 이 문장 또한 미숙한 통찰이다. 왜냐면 우리 엄마만 하더라도 쉰이 될 때까지 이뤄지지 않을 계획 세우기를 무수히 반복했다고 하셨으니까.

여러 회사에 지원을 했고 몇 군데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중 한 곳과 이야기가 잘 되어 입사가 결정됐다. 딱히 쉬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바로 출근할 수 있도록 퇴사와 입사 일자를 조정했는데, 남은 연차를 태웠더니 꽤 긴 연휴가 생겼다. 뭐할지는 모르겠다. 여행을 가볼까? 거리두기 2단계구나. 친구 만나러 전국투어? 아…코로나… 업무용 툴이나 좀 공부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지막 휴가와 전역을 기다리던 말년 병장 때 기억이 조금 떠오르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과거를 털었다는 시원함, 남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떠나는 사람의 심정은 언제나 이렇구나.

아무도 눈치 못 챘겠지만 나는 조금씩 이별을 준비했다. 쌓아 뒀던 벽을 허물고, 그었던 선을 지웠다. 이 관계를 없었던 걸로 하려고? 아니,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고 싶어서. 과연 직장 동료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노. 그럼 (전) 직장 동료는? 여기에 답하려면 나름 정교한 셀프 검증 시스템을 거쳐야 했다. 이들 개개인은 나와 성향이 맞나? 나는 이들을 어떻게 느끼나? 반대로, 내가 그들에게 친구가 될 만한 사람으로 비쳤을까? 그제서야 무심했던 말과 행동들이 조금 후회됐다. 음, 아니. 솔직히 말해 후회는 안 했던 것 같다. 굳이 그럴 것까진 없었는데 오바했네, 뭐 이 정도? 아직 어리구나. 여전히 내 기준만 고집하네. 아이고, 못난 자슥. 뭐 이런 느낌.

“저녁에 시간 안 되면 주말에 봐도 되고요.”

동료의 말과 그 말을 들은 내 반응을 보고 비로소 실감했다. 혼자 쌓았던 벽이 허물어지고 그었던 선이 지워졌다는 것이. 한 시절이 정말로 저물어 버렸다는 것이.

“아, 그러네요. 우리 이제 직장 동료 아니니까 주말에 봐도 되겠다.”

다음 시절도 어김없이 저물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그 시절들이 일생을 지탱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에.(20.11.25)


 


 

마감도비


우선, 아매오님의 후회 없는 퇴사와 성공적인 이직을 축하드립니다. 결정은 속 시원히, 성찰은 찬찬히 오래도록 하는 아매오님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게 되는 거 같아요. 부디 퇴사 전 연차 소진이라는 신이 내린 선물을 잘 이용하셨으면 좋겠네요. 퇴사 후 직장 동료들을 만나는 기분은 어떤 걸까요? 나중에 직접 들려주세요. 애환을 같이할 동료가 없어 전 직장을 퇴사했던 저로서는 부러운 부분이네요. 막연하게나마 동료를, 그리고 자신을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언젠가 현 직장을 떠날 때 저도 주위 동료들에게 주말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게 작은 바람이라면 바람입니다. 술자리가 제 멋대로 시작했다가 결국은 결핍을 남겼다는 소설의 문장과는 달리 아매오님의 술자리는 시절이 지날수록 더욱 든든해져만 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야망백수


오늘 아말년님 편지는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군요. 왜, 그런 영화 있잖아요. 돌고 돌아 처음 시작할 때 그 자리인듯하면서도 주인공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끝나는 영화들이요. 저는 그런 표정을 보는 걸 정말 좋아한답니다. 제가 마무리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라 더 그런 것 같아요. 돌아보면 언제나 완전히 박살내버리거나 지긋지긋해져야만 겨우겨우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그게 아니면 몇 달을 지난 시절의 노을만 보면서 살던가요...쩝ㅎ 여튼 정말 부럽고 축하합니다. 저도 끝날 걸 알면서도 행복하게 시작하는 마음을 배우고 싶어요. 담에 만나면 시원섭섭한 웃음 1회 부탁합니다. ‘-^

 

파주

퇴사, 보기만 해도 짜릿한 단어네요. 에세이를 읽다 보니 첫 회사에서 퇴사할 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네요. 한창 자존감이 낮았던 때라, 무능한 나 따위 인간을 어디서 뽑아주겠어라는 심정으로 몇 달간 퇴사를 고민했더랬죠. 물론 세상은 넓고 일자리는 많아서 저 따위를 뽑아주는 곳이 많더라고요. 물론 '무능한 나'라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거였지만요. 다음 스텝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셨지만,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일단은 아매오 님의 성공적인 퇴사를 축하드립니다. 직장인에서 직장인이 되는 것이지만 출근하는 곳의 환경이 바뀐다는 건 늘 예상을 뛰어넘는 변화더라고요. 남은 연차를 화끈하게 소진하면서 새로운 곳에 출근하기 전까지 잘 재충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쉬어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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