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 파주
#1
‘모든 직장에는 또라이가 존재한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1조 1항-
새삼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떠올렸다. 이곳에 출근한 지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직장에 그럴싸한 또라이가 보이질 않아서다. 지금까지 쌓아온 데이터로 추정컨대 모든 조직에는 또라이가 있기 마련. 또라이는 꼭 포켓몬스터 게임 속의 꼬렛이나 구구 같은 존재여서, 직장에서 또라이를 맞닥뜨리는 건 이쪽의 선택권이 없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헌데 이상했다. 이만한 조직에 분명 또라이가 없을 리 없는데, 도통 보이질 않았다. 또라이가 괜히 또라이인가. 옆 동네 미친개와 맞먹는 지랄 맞은 성격, 그 과정을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사고 회로, 듣기만 해도 짜증이 솟구치는 목청까지, 누구라도 척하면 척하고 또라이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니 또라이가 있다면 내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불안이 엄습했다.
#2
‘만약 또라이가 없다면, 당신이 바로 그 또라이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1조 6항-
불안감의 원천은 내가 이 조직의 또라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대개는 목소리 크고 성격 고약한 상사가 또라이인 경우가 많겠지만, 사실 또라이라는 게 별 게 아닐지도. 또라이가 직장에 융화되지 못한 채 유독 튀는 빌런을 지칭하는 거라면 허투루 경력을 쌓은 경력직이나 무능한 신입도 빌런이라 불리기 충분하지 않을까.
마침 막바지에 다다랐던 프로젝트가 목전에서 뒤엎어졌다. 그간의 하잖은 수고 또한 공중분해 됐다. 거북목과 시력감퇴를 제물로 삼아 쏟았던 수개월이 허송세월이 된 셈이다. 일에 대한 의욕은 박살났고 덩달아 직장인으로서의 자존감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다른 일까지 지지부진하면서 자기확신마저 사라지는 데에 이르렀다. 약소한 내 월급 값만큼의 노동도 해내지 못하자 의심은 확신이 되어갔다. 빌런이 통 보이질 않더니 그게 설마 나였나. 그래, 이 구역의 미친 또라이, 보기만 해도 짜증나는 빌런은 틀림없이 나였구나.
#3
‘강한 또라이가 없다면 약한 또라이 여럿이 있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1조 3항-
“직장에 꼭 한명씩 빌런이 있다던데, 여기는 빌런이 없는 것 같아요.”
같은 부서 사람들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방심한 사이에 고민하던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한편으로는 ‘그 빌런이 나는 아니라고 해주세요. 제발’이 응축된 답정너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참 졸렬하기도 하지.
다행히 그 말을 들은 직장 동료는 구태여 ‘그렇다면 그건 아마도 너일 것’이라고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읊어주지는 않았다. 대신 입술을 이상한 모양으로 만들며 끔찍한 소리를 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파주 씨, 빌런이 누군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마치 해리포터 세계관에서 볼트모트를 ‘You-Know-Who(그 사람)’라고 지칭하듯 모두들 빌런을 에둘러 이야기했다. 신기한 건 저마다 말하는 빌런이 달랐다는 거다. 뉘앙스로 추정해 보건대 누구는 백두혈통을 빌런이라 했고, 또 누구는 대가리의 직속라인이야말로 진짜 빌런이라 했다. 내가 모르는 빌런이 이렇게나 많았나.
#4
언급된 빌런들을 곱씹어보면서 되려 고민이 깊어졌다. 내 눈에는 그저 유쾌하고 친절한 직장 동료가, 혹은 상사로서 마땅히 할 일을 충실히 해내는 게 전부인 사람 또한 빌런이라니. 내가 눈치가 더럽게 없는 걸까. 이런 식이라면 이곳은 또라이 질량의 총량을 넘어서는 게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겐 엄청난 빌런인데 사람들이 아직도 모르는 걸까. 아니, 이런 식이면 애초에 빌런이 아닌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한참 전에 읽었던 칼럼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적어도 월급 받는 직장인이라면 모두 빨리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서 침대에 뒹굴거리고 싶은 마음이지 않을까. 부서의 장은 소속 부서원들을 어르고 닦달하며 성과를 내고, 실무자들은 주어진 일을 해치우며 밥값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할 뿐. 그러니 직장에서 순도 100% 절대악의 빌런이란 건, 사실 없는 게 아닐까.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것도, 사실은 고된 직장인들이 유머로 만들어 낸 허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아직 호되게 당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인간 자체가 물러서 그런 건지, 혹은 그럴싸한 또라이를 만난 적이 전무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나른한 수요일 오후, 교정해야 할 글씨로 가득한 모니터를 외면한 채 고개를 처박았다. 빌런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 몇몇 얼굴들이 스쳐갔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이내 아끼는 펜을 들곤 양장노트 여백에 오래도록 고민한 문장을 꾹꾹 눌러 썼다.
‘직장에서 절대적인 빌런은 없다. 단, 대가리(대표)는 예외다.’(20.11.18)
신기하죠 저도 두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아직까지 나쁜 직장 상사나 동료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제 직장 생활을 지켜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는 거죠. "너네 OO 또라이 아냐? 어른인데 왜 이렇게 철이 없어?"라고 성토하는 모습을 보면서 좀 놀라기도 했구요. 그간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퉁쳐 왔던 터였거든요.
그러고 보면 빌런이 없을 경우가 꼭 본인이 빌런일 가능성만 있는 건 아닌거 같아요. 남탓이 아니라 자기탓을 하는 사람 중에선 빌런이 없으니까요. 아니면 자책 만큼 심적으로 가혹한 건 없으니 자기 자신에게 빌런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네요. 역시나. 또라이 질량 보존 법칙은 정확하군요. 파주님, 늘 응원합니다. 남에게 빌런이 되지 않는 정도면 족하죠. 스스로에게 히어로가 되기로 해요.
누구에게나 자신의 단점이 부각되는 순간은 오기 마련입니다. 단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의 상황이나 분위기, 당사자가 그때의 장면을 기억하는 방식, 반복 여부 등에 따라 빌런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것 같아요. 같이 일하는 상황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때를 가장 경계합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게 되는 바로 그때요. 자신을 향한 불편함을 꼭 붙잡고 있는 사람들만이 빌런행 특급열차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직장에 절대적인 빌런은 없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모두가 각자 서 있는 조건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선의 성격으로 서로를 대하는게 우리네 풀칠러들의 세상 아닙니까. 누군가를 빌런이라고 생각하는 건 간편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보면 나의 정신건강에도 해로운 것 같아요. 나도 언젠간 누군가에게 빌런이었음을 깨닫게 될 텐데, 여태까지 빌런을 욕해왔다면 그 이율배반을 어떻게 견디겠어요? 유사시 나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해 빌런을 열심히 이해합시다. 살다보면 훈련을 통해 다져진 건강한 이해심 덕을 볼 날이 있겠지요. 아무래도 저는 빌런이 활개치는 세계관보단 그냥 다 같이 고된, 밀레의 감자캐 는 농부들 같은 풍경이 더 취향인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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