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 마감도비
지난 두 달간 팀장에게 반복적으로 들은 말은 ‘너무 무리하지 마라’였다. 지금 직장을 다니게 된 지 8개월 만의 일이다.
“일을 열심히 하니까 위에선 좋아하는데, 무리하진 마. 한 번에 너무 무리하면 탈이 나게 돼있어. 길게 봐, 길게. 건강은 본인이 챙겨야 되고, 막말로 회사가 평생 책임져주는 것도 아냐.”
회사 건물 뒤편, 으슥한 막다른 골목길에서 담배 타임을 가지던 팀장이 나를 보며 얘기했다.(살면서 무수히 많은 담배 타임을 가져봤지만, 정작 건강염려증이 있는 마감도비는 태어나서 담배를 태워본 적이 없다.)
그런 말을 들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중소기업이다 보니 한 사람당 맡아야 하는 일의 양이 적지 않았다. 좋게 말해서 적지 않다, 이고 적어도 1.5~2인분의 몫은 해야 했다. 그리고 반년 넘게 지금 직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 결과가 나쁘지 않았나 보다.
일 자체가 재미있기도 했거니와 숙련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일종의 ‘뽕’이 가득 차오른 점도 컸다. 그래서 점점 더 부지런을 떨었고 회사에서는 빈말이더라도 일을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칭찬을 들어서 기분 나빠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면서 마음 한 켠에 희망도 자라났다. 새벽녘에야 업무를 모두 마치고 샤워를 하면서 생각했다. 그래, 대기업이 아니고서야 회사 안에서 승진은 어렵겠지, 그래도 나한텐 아직 이직이라는 카드가 있잖아. 여기서 열심히 일하면 내 커리어가 나아지겠지, 업계에도 입소문이 나겠지. 그래 지금 좀 무리하더라도 해내버리자, 하며 피로감을 꾹꾹 눌렀다.
그런데 꾹꾹 눌러버린 게 피로만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지난주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평소와는 기분이 좀 달랐다. 아침에 일어나서(작년 11월부터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메일함을 확인하고 하루를 시작해야 하는데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피곤한 것과는 달랐다. 몸 어디가 심하게 쑤시는 것도 아니고 잠을 못 잔 느낌도 없었다. 그냥, 무기력했다. 전날까지도 잠을 줄여가며 새벽까지 일을 한 게 무색하게 다음 날은 모든 업무가 귀찮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와, 나 또 번아웃인가.’
예전에도 풀칠레터에서 ‘번아웃’이라는 주제로 과중한 업무와 그로 인한 피로에 대해 한번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결이 달랐다. 번아웃이 타의에 의한 결과였다면 이번에는 크건 작건 내 의지가 뒤따랐다.
그리고 내가 방금 일어난 원룸을 둘러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때 깨달았다. 하루 일과도, 일주일도, 더 나아가서는 내 삶도 전력투구라는 전략만으로는 헤쳐나갈 수 없다는 걸. 나를 챙기고 돌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방 한구석에는 옷가지들이 두서없이 엉켜있고, 싱크대에는 설거지를 바라는 접시와 주방도구가 현대미술의 상징마냥 무질서하게 쌓여있었다. 또 다른 한편에는 정신없이 일을 하고 어둑해진 밤 시켜 먹은 배달음식 포장용기들이 쌓여있었고.
그런 것들이 일종의 메타포처럼 느껴졌다. 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자기 착취로 내가 외면하고 미뤄둔 하루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좋은 커리어를 챙기고, 더 나은 처우를 받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내 삶이 안온하기를 바라서인데. 지금 내 삶은 차곡차곡 정갈하게 쌓여가는 게 아니라 그저 해결해야 할 과제처럼 산적해가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직장인으로서 또 한 번 몸져누운 뒤에야 회사 말고도 내가 나 자신을 착취할 수도 있다는걸, 스스로에게도 브레이크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후로는 욕심이 생겨도 자제하려는 노력을 한다. 워, 워, 길게 보자, 길게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착취하는 걸 멈춰야 남도 착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느낀 건 덤이다. 집 안에 쌓여있는 당일배송 택배 상자와 일회용품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일에 치여 하루를 돌보지 못하면서 그런 간편한 서비스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고. 그 서비스 뒤에는 또 다른 사람과 자원이 착취당하고 있었겠지, 하고 말이다.
멈출 줄 알아야지. 악순환을 멈춰야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위해서.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설거지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면서 다짐했다.
하늘 끝까지 가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우주에서 겪을 수 있는 공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자기착취’라는 단어를 제 자신에게 슬쩍 대봤다가 부끄러움만 느꼈습니다. 그만큼 열심히 살아본 적 없어서요. 아니지, 부끄러움이 아니라 안도감이나 자랑스러움을 느껴야 건강한 개인, 건강한 사회 아닌가? 하지만 정말 열심히 사는 주변 사람들을 떠올리면 이런 생각조차 그저 염치없는 자기위로처럼 느껴집니다.
마감도비 님이라면 우주 속에서도 부지런히 유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실 거라 믿습니다. 저는 육지에서 폴짝폴짝 뛰며 나름의 살 궁리를 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파이팅해보아요.
저희 할머니가 입에 달고 사셨던 말 세가지가 떠오르네요.
1. "잠이 보약이다"휴먼은 원래 8시간은 자야 하는 생물이라고 합니다. 8시간보다 적게 자고 있는데도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면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은 이미 순리를 거스를 만큼 부지런합니다.
2. "이것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3. "죽고 사는 일 말고 큰일 없다" 작은 일로 스트레스 받아서 큰일 치루지 않도록 하십시다.
저는 할머니 말씀을 차마 거스를 수 없어 요러코롬 살고 있습니다. 저랑 반만 섞어요 마감도비님 엉엉.
마감도비 님이 퇴근 직후 녹초가 된 모습으로 야식을 먹으러 온 일이 자주 있었죠. 맵고 짠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는 말에 떡볶이나 마라탕 같은 강렬한 음식을 식탁에 올렸고요. 주린 배를 채우며 마감도비 님께 '오늘 마감은 잘 끝냈고?'라고 물어보면 늘 '아직 시작도 못했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세상에, 우리가 야식을 먹던 시간은 늘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수면에 들었어야 할 시각이었는데 말이죠.
이미 마감도비 님의 몸과 마음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떤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네요. 다만, 대한민국의 도비에게는 스스로 양말을 선물할 권리가 있다는 걸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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