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밋밋한 점심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1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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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야망백수

 

 퇴사한 지 어느새 1년이다. 원래 계획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기였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받아서 하는 잡식성 노동자가 되었다. 내가 지금 백수인지, 프리랜서인지, 뭔지 모를 아리송한 상태로 시간이 쌓이는 것이 처음엔 불안했지만 요즘은 괜찮다.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이니까 사랑하진 못해도 미워하진 말아야 한다고 도 닦는 소리를 숱하게 되뇐 덕분에 이제는 섣불리 희망에도 절망에도 몸을 내맡기지 않는, 그런 심드렁한 안온함을 즐기게 되었다. 한마디로 그럭저럭 살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밥벌이를 시작한 친구들도 딱 나만큼 그럭저럭 살게 된 것 같다. 1년 전엔 취업한 회사도 다르고 업무도 다르고 일에 대한 만족도도 제각각이라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 보니 그렇지도 않다. 다들 아침엔 일하러 가고 퇴근하면 운동 좀 하고 좀 주말엔 맛있는 음식 사진을 인스타에 올리면서, 비슷하게 사는 듯했다. 들쭉날쭉한 삶의 그래프가 1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풍화되어 평평해진 걸까? 아니면 달라봤자 정규분포 안이었던 걸까? 1년 전에 다르다고 생각했던 건 죄다 그대로인데, 이제는 비슷하단 느낌이 압도적이라는 게 이상했다.

 오늘은 휴가를 쓴 J가 같이 점심을 먹자며 찾아왔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J의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우리는 지금 여전히 같은 도시에 있고 여전히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요즘 나는 J의 집을 찾지 않는다. 이유를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그냥 그래야 한다는 걸 안다. J의 차를 타고 학교 근처의 국밥집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학교 근처에 와서 밥을 먹었는데도 학교 이야기는 둘 다 거의 하지 않았다. J는 요즘 야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출퇴근이 없으니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육개장 맛이 좀 변했다는 이야기를 했고 비싸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서로 늙었다는 이야기를 하다 넌 그대로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보다 벌이가 좋은 J가 밥을 샀고 나는 커피를 샀다. 점심시간 1시간을 보낸 다음 나는 다시 노트북을 켰고 J는 세차를 하러 갔다.

 J와 나의 점심시간은 즐겁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웠지만 밋밋하기도 했다. 어색한 사이끼리 대화할 때 생기는 싱숭생숭함과는 같은 듯 다른, 그럭저럭 살고 있는 두 사람이 닿았을 때 생겨나는 그런 밋밋함이었다. J를 보내고 나니 우리는 모두 비슷하게 그럭저럭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럭저럭. 불안에 시달리면서 스스로를 채찍질하길 관두고 심드렁한 안온함에 젖어들면 삶의 운동에너지는 감소할 수밖에 없다. 이건 물리법칙과도 같은 건조한 사실이다. J와 나는 비슷하게 삶의 운동에너지가 감소하는 시기를 맞은 것뿐이다. 물리법칙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감상을 덧붙이는 건 멍청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 물리법칙의 건조함이 왠지 관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아 서운하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밋밋함 이상의 무언갈 나누고 싶다. 같이 뭐 먹고살지를 고민하고 위로하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던 그럭저럭 이전의 점심을 먹고 싶다. 그걸 위해서라면 불안하기만 했던 1년 전 갓 퇴사했을 때의 마음을 다시 겪어도 괜찮을 것 같다. 꼭 한 번 정도는 그런 용기를 더 낼 수 있을 것 같다. (21.04.14)

 


마감도비


제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둘러볼 때, 어느 샌가 모두가 비슷하게 살고 있다는 말에 공감이 가네요. 대기업에 다니는 한 친구를 만나서 서로의 고민을 토로할 때, 그 친구가 이렇게 얘기하더라구요. “사는 게 참 재미없어졌어”라고 말이죠. 저는 순간적으로 “야, 너는 월급이라도 재미있지!”라고 말할 뻔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그 친구의 고민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결국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동료, 더 나은 은퇴와 같은 고민은 어디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풀칠러를 포함해서 주니어, 그리고 우리 세대 모두가 삶의 운동에너지가 감소하는 시기를 지나고 있는 걸지도요. 오히려 그래서 야먕백수님의 마지막 문장이 더 힘이 되는 거 같아요. 용기, 항상 배워갑니다!

 

 

아매오

 

얼마 전 언론사 입사 시험을 함께 준비했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저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현직 기자로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일까요? 이 친구들을 만날 때면 항상 '아, 나는 진짜로 저기서 멀리까지 왔구나'라고 생각한답니다. 함께 공부하던 시기 누구보다 자주 보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줬고 저로서는 연줄 없는 서울의 '원점' 같은 친구들이지만, 현재가 되지 못한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현재는 저를 계속 돌아보게 해요. 그럭저럭 살고 있는 건 비슷하지만, 뭐랄까, 걔네를 만날수록 저는 남겨두고 온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할까. 흠 어쩐지 좀 쓸쓸한 마음도 좀 드네요.

 

 

파주

한동안 백수생활을 해서인지 야망백수 님이 묘사한 ‘밋밋함’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타인과 나의 공감대가 다를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그 밋밋함을요. 우선 직장인의 공통분모라면 회사에서 겪는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사건들이 있겠죠. 사내에서 활약하는 빌런의 일화를 하나씩만 꺼내도 하루가 부족할 겁니다. 반면 백수끼리의 만남은 비교적 평화롭습니다. 마치 <모여봐요 동물의 숲>의 현실판처럼요. 최근에 만난 백수 친구와는 코어근육을 기르는 데에 집중한다, 최준에 준며들고 있다는 삼삼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물론 미래에 대한 불안(뭘 먹고 살 것인가)도 있었죠. 아마 직장인이 되면 저는 또다시 과격한 단어들을 활용해 평일 동안 쌓인 울분을 덜어낼 겁니다. 벌써부터 끔찍하네요. 그러니 저는 지금 누릴 수 있는 약간의 불안과 평화로움을 만끽하려고요. 사실, 이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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