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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직함을 왜곡하나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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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야망백수

 

직함이란 무엇일까? 낯선 누군가를 만나, 직함으로 자기소개를 할 때, 우리는 특별한 인지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상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조직 내 위상은 어떤지 등의 정보를 처리해낸다. 교육수준, 소득 등 사회경제적 지표에 대한 ‘적정 예상치’도 유추해내고, 이에 맞춰 대화주제를 고른다.

직함은 일종의 표지판이다. 취향이나 MBTI가 사적인 정체성을 안내하듯이, 직함은 공적인 정체성을 안내한다. 표지판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적혀있는 내용이 진짜라는 확신이 있어야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직함은 제대로 기능하는 정직한 표지판이 아니다. 어떤 의도로 직함의 왜곡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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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첫 번째로 겪은 직함의 왜곡은 군대에서였다. 나는 헌병이었다. 헌병들은 종종 터미널에서 모자를 안쓰고 돌아다니는 휴가자를 잡는다던가, 핸드폰을 들고 오는 간 큰 휴가복귀자를 잡는다던가 하는 뭐 그런, 라떼에 학교에서 학생주임이 하던 일이랑 비슷한 일을 군기단속이라는 이름으로 하곤 한다. 나도 일병 때 군기단속을 나가게 되었는데, 선임이 자기 계급장을 내 가슴팍에 붙여줬다. 때아닌 조기진급으로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선임은 일병이 군기단속하면 ‘ㅈ밥’같아 보여서 안된다고 했다. 그렇게 일병 야망백수는 상병 야망백수가 되어, 헌병반이 ‘ㅈ밥’으로 보이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며 하루를 보냈다.

두 번째로 겪은 왜곡은 대학 졸업 후 인턴을 할 때였다. ‘연구원’들이 다니는 회사였다. 나는 연구원이라길래 다들 백색 가운을 입고 현미경을 들여다보거나, 산처럼 쌓인 논문에 파묻혀 있을 줄 알았다. 근데 막상 회사에 와보니 수석연구위원, 연구위원, 연구원 모두 등산복과 정장에 절묘하게 한발씩 걸친 복장으로 예산을 쓰고 외주를 주고 회의를 여는, 걍 보통 회사원의 모습을 띄고 있는 게 아닌가. 대학교수들이 행정업무에 치여서 연구를 못한다는 뉴스를 본 적 있는데, 교수들이 항의 차원에서 아예 연구원의 뜻을 ‘행정업무를 맡은 자’로 바꿔버리기로 합의라도 한 걸까? 사실 그곳에서 연구원은 직무의 성격이 아니라 고용의 형태를 드러내기 위한 단어였다. 연구원의 의미는 정규직이었다. 비정규직은 ‘담당’이었다. 맡은 일은 있되, 인텔리한 이미지는 취할 수 없는 신분의 한계가 잘 드러나는 직함이다. 나는 걍 인턴이었고.

나는 무슨무슨 조사연구(프로젝트를 연구라고 부르는 분위기였음.)보조를 맡았는데, 주 업무는 전화받기였다. 유관기관의 담당자들은 지치지도 않고 지침에 대해 묻는 전화를 걸어댔다. 지침에 대해 문의 전화가 걸려오는 상황은 지침에 문제가 졸라 많다는 걸 의미한다. 몇 건의 전화응대 후에 나는 ‘왜 이런 쓰레기를 던져줬냐는 물음에 명확하고 즉각적인 답은 드리진 못하지만 짜증은 기꺼이 받아주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내 역할이란 걸 깨달았다. 총도 없이 최전선에 내몰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원래 총알받이는 젊은이들이 해야 제맛인 법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근데 이 연구는 문제가 참 많았다. 어찌나 문제가 많았는지 데드라인을 지킬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게 꽤 큰 일이었나보다. 유관기관의 연구원들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우리 회사로 우르르 쫒아올 정도였으니까. 나는 최전방의 실무자 자격으로 그 자리에 배석했었는데, 팀장(수석 연구위원)은 그 적의에 찬 오랑캐들에게 나를 담당 연구원이라고 소개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나는 제도의 구조적 문제까지 운운하며 제때 데이터를 넘기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웅변했다. 말하는 사이 사이 정적이 흐를 때마다 ‘왜 니들이 일 똑바로 안하고 변명까지 날 시켜 나 인턴인데 이건 사기야’라고 생각하긴 했지만...그 방어전 이후로 수석연구위원은 종종 나를 연구원이라고 승격시켜 불렀다. 나는 스스로 연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서의 연구원도 아니고 정직원이라는 의미의 연구원도 아닌 걸 알곤 있었지만, 그렇게 불릴 때마다 연구원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엘리트 고소득 전문직의 후광이 내 토라진 마음을 녹여낸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었다. 연.구.원.님.을 바꿔달라는 전화를 받을 때의 감정이란. 나는 인정 받았다는 생각에 뿌듯해하다가도 꼴랑 립서비스를 품삯으로 던져주며 살뜰히도 부려먹는다며 분노하고, 연구원이라는 직함의 달콤함을 음미하면서도 내가 고작 이딴 호가호위로 허영을 채우는 속물이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다. 분열된 자아의 젊은 연구원은 퇴근길이면 늘 혼잣말을했다. “시벌 전환시켜줄 것도 아니면서”

세 번째로 겪은 직함의 왜곡은 영상을 소규모 프로덕션에서 알바를 할 때 였다. 외주 영상 업무를 주로 하는 소규모 프로덕션은 한국 사회의 통상적인 골품제(알바-비정규직-정규직)를 벗어난 경우가 많다. 사장과 고인물 한두명을 뺀 모두가 알바이며 비정규직이며 정규직이다. 직원들은 오래 발담구기 싫어서 스스로를 알바라고 생각하는데, 사장은 (계속 부려먹고 싶어서 일까?) 직함을 마구마구 올려쳐 팀장이 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직함 올려치기는 외주 업체와 회의할때는 조금 더 심해진다. PD, 팀장, 디렉터 등 잔뼈깨나 굵은 중간관리자의 느낌을 내는 직함을 달고 가야 함부로 못대한다나. 상병 계급장을 달고 군기단속 나가던 그 때 그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사회는 순진한 20대 초반 청년이 모인 군대가 아니다. 나보다 족히 10년은 더 굴러먹은게 분명한 능글맞은 담당자가 “아이고 팀장이세요^^?”라고 했을 때의 화끈거림이란.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근데 사실 이 정도면 양반이다. 거친 바닥이니까. 클라이언트가 “야 니가 피디야? 피디? 새꺄?”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밖에도 내가 직접 겪거나 들은 직함의 왜곡 사례는 차고 넘친다. 직원이 셋인데 한명은 회장, 한명은 사장, 한명은 부사장인 <인플레이션>형도 있고, 10명 정도 되는 조직에 5명이 본부장(옛날 드라마 남주 단골 포지션인 그 본부장)인 <책상이 곧 본부>형도 있다. 갑자기 사원-대리-과장이었던 직함을 매니저-PM-PL-PD로 바꾸는 <환골탈태형>도 있는데, 이 땐 푸근한 인상의 ‘000과장’님을 아이돌그룹의 멤버의 예명처럼 들리는 ‘000PL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사원,아니 매니저들이 생겨난다. 환골탈태는 보통 윗대가리가 힙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을 품었을 때 생겨나는 현상이다. 실제로 어떤 매니저는 내게 새로 뽑은 명함을 건네며 “사장이 박진영처럼 PD로 불리고 싶었나봐요”라고 했다.

 

2

언젠가 한번은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이 참을 수 없는 직함의 왜곡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있다. 나는 누구나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지만 하나의 정체성이 타의로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건 문제라고, 헤라클레스가 평생 고통에 시달렸던 이유도 여기선 신이었는데 저기 가선 인간이라고 해야하는 반인반신의 운명을 타고난 탓이라고 말했다.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을 다니는 친구는 어디서 읽었는지 기표와 기의가 어긋나면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증가하고 저신뢰사회가 되는 법이라고 주억거린다. 척척석사답다.

척척석사는 대학원 생활이 너무 괴롭고 고독한 나머지 데이트앱을 깔았다고 한다. 척척석사에 따르면, 남성유저의 33%는 CEO, 다음 33%는 ‘쎄오’, 나머지 33%는 헬스트레이너라고 자신을 소개한다고 한다. 척척석사가 어플 화면을 보여준다. 정말 ‘ceo’ 혹은 ‘쎄오’라고 적어둔 건장한 청년들이 많았다. 정부의 청년창업활성화정책이 드디어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일까?

CEO들을 만나봤냐고 물었다. 친구는 일반화하긴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지만, 경험론적으로 CEO들은 대화 소재가 극히 한정적이었으며, CEO보단 쎄오라고 적어둔 사람들이 더 섹스매너가 후진 경향을 보였다고 했다. 몇 번의 실험 이후로는 죄다 거르고 있어서 귀납적 방법론을 채택한 <ceo 및 쎄오 직함과 섹스매너와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는 더 진행하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물었다. “그들은 정말 쎄오였을까?” 친구가 답한다. “쎄오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하는 일에 쎄오적인 면모가 있는 것 뿐일 수도 있지”

나는 열을 올렸다. “쎄오인 것과 쎄오적인 면모가 있는 건 엄연히 다르잖아! <아큐정전>에서 아큐는 자기가 대머리라 변발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 혁명적인 면모라고 생각해 혁명당원인 척 하다가 결국 처형당한다고!”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쎄오들은 계속해서 척척석사의 화면에 나타난다. 척척석사는 냉소를 띄며 말한다. “데이트앱 자기소개에 누가 진짜로 적어놓냐. 다 가오지 뭐”

가오. 쎄오들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처형하는 척척석사를 보며 나는 마침내 직함을 왜곡시키는 원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가오였다. 지휘 체계가 생명인 군대, 알쏭달쏭 사회, 누구도 진실을 기대하지 않는 데이트앱 어느곳 하나 가릴 것 없이 전부 가오를 잡고 있어서 직함이 요지경이었던 것이다. 가오의 렌즈로 사회를 해석하는 이 이론의 이름은 <가오론>이다. 

가오는 외집단에 얕보이기 싫을 때 잡는 ‘외향형 가오’와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내향형 가오로 유형화 할 수 있다. 내향형 가오는 다시 직원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돈은 주기 싫을 때 가오라도 실컷 부리라고 직함을 올려치는 '회유형'과 조직과 직원이 일심동체가 되는 '자기최면'형 가오로 나뉜다. <가오론>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테제를 수용한다. 자리는 곧 직함이다. 가오는 직함을 왜곡시키고, 직함=자리는 사람을 만드니 결국 개인은 '가오에 몸을 지배당하게' 되는 것이다. 타의로 가오를 잡게 되는 상황에 처한 개인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가오 권하는 사회'다. '가오 권하는 사회'에선 직함을 신뢰할 수 없으므로 의사소통에 불필요한 긴장이 발생하는 것이 특징이며, 개인은 냉소의 정서를 띄는 경향을 보인다. 나는 당장 척척석사에게 나의 이 놀라운 이론을 알리기로 했다. 나는 메뉴판 위에 한 손을 올려두고, 다른 한 손은 안주머니에 꽂은 채 이렇게 말했다. “가오가 직함을 규정한다.”

 

3

<가오론>은 학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다. 초기엔 진시황도 아니고 칭제건원하는 사람을 색출해서 처형이라도 하자는 거냐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내심 가오잡는다는 소리를 듣는 걸 치욕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꼰대론>이 발표되자 행여나 꼰대 소리 들을까 꼰대짓을 하지 못하게 된 것과 비슷한, 해방적 위축의 분위기였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데엔 ‘반-가오-레지스탕스’들의 운동이 큰 역할을 했다. ‘반-가오-레지스탕스’는 <가오론>에 영향을 받아 결성된 직장인 비밀결사 조직이다. 이들은 매주 월요일 아침 회의실에 포스트잍을 붙여두는 방식으로 활동했다. 일부 극단주의자들은 가오 오지게 잡는 이들의 등에 포스트잍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겨지진 않았다. 역사가들은 이를 포스트잍 저항이라고 명명했는데, 조용하면서도 효과적인 저항이었다고 평한다. 포스트잍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가오 좀 잡지 맙시다> (21. 03. 17)


마감도비


개인적인 경험으로 시작해서 사회 전반에 깔린 고용 문제를 짚었다가 결국에는 ‘가오론’으로 이어지는 글,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역시 야망백수님의 글맛은 짜릿하네요.

직함, 직급, 명함 등등. 직장인에게 ‘자신이 무엇으로 불리느냐’는 참 오묘하고 불편한 문제인 거 같아요. 실제로 대외 업무가 많은 부서일 경우, 직급을 하나 높여서 불러준다는 점에서 야망백수님의 군대 경험과 이 사회는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걸지도요. 야망백수님의 글을 읽다보니 기업 내 수평적인 문화를 위해 전 직원이 서로 ‘~님’이라고 부르기로 한 중견기업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문화가 먼저지, 명칭이 먼저겠어요. 부서장은 부서장대로, 사원은 사원대로 모두가 불행해졌고 결국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고 해요. 남을 윽박지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파요.

 

아매오


신문학과가 신문방송학과로, 신문방송학과가 언론정보학과로, 언론정보학과가 커뮤니케이션 학과로 변하는 과정을 보며 학문이 시대상을 반영하는 자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 적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무릇 이름에는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지나온 과거의 흔적, 걷고 있는 현재의 모습, 추구하는 미래의 지향점이 담겨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이름은 언제나 미래만을 담고 있군요. 이러저러한 사람이 되라는 바람만으로 지은 것이니까요. 그러한 바람은 보통 구체적이지 않죠. 어쩌면 우리가 본명 외에도 다양한 이름(별명이라든지, 직함이라든지 하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해줄 구체적인 무언가 필요한 것이죠.

그나저나 ‘책상이 곧 본부’라는 네이밍은 기가 막히네요. 갑천의 현자 야망백수님의 통찰력과 표현력에 크게 웃고 갑니다. 아니, 가지 못 하네요. 이 레터가 발송되는 지금도 저는 아직 회사랍니다. 호호.

 

파주

환골탈태 유형을 겪은 한 사람으로서 우습기 짝이 없는 현상을 '가오론'으로 풀어낸 야망백수님의 시선에 박수를 보냅니다. 어제의 과장님이 오늘의 PL님이 되면, 호칭을 부르기가 어색해서 "저, 저기요"를 남발하게 되거든요.

물론 직함과 직위가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당연히 필요한 요소겠죠.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과장님이 PL로 바뀌는 '직함 혁명'을 겪고 나면 괜한 불편함과 황당함만 남기 마련입니다. 부르는 쪽도 듣는 쪽도 민망한 그때의 직함 환골탈태는 정말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직도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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