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대체불가한 사람은 없어요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12. 18:16

본문

WRITER : 아매오

 

우리 셋은 반 년씩 텀을 두고 차례로 퇴사한 '전 직장 동료'다. 마지막 순서였던 나의 퇴사 이후 또 반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각자 직장에서 퇴근한 뒤 옹기종기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며 겪었던 고충이나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 실컷 떠들었다. 저마다 다른 경력을 쌓고 있었지만 모두 동의하는 결론 하나는 분명했다. 현재 직장이 자신과 꼭 맞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구관이 명관' 소리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 우리는 커리어 패스에 기어코 (미세하지만) 우상향곡선을 그려냈던 셈이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때 네가 합격했으면 내가 퇴사 못 했지. 우하하하!"

A는 자신이 퇴사 소식을 알렸던 때 얘기를 꺼냈다. 당시 나는 몰래(?) 이직 면접을 보고 최종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A가 선수를 쳤다.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결과에 따라 A와 내가 동시에 퇴사할 수도 있다. 그럼 우리 팀에 남는 이는 입사한 지 3개월 된 신입 하나. 물론 대단한 일꾼도 아닌 나 하나 없다고 회사가 멈춰서진 않겠지만 적어도 신입에겐 못할 짓 아닌가. 우선 재빨리 털어놨다. 나 여기 붙으면 갈 거고, 가게 되면 당장 다음주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당신이 상사니까 대책 마련을 부탁합니다… 주말 동안 '대체 가능성'에 골몰했다. 경우의 수는 세 가지였다.

(1) 아매오 이직 성공 + A 퇴사

(2) 아매오 이직 성공 + A 잔류

(3) 아매오 이직 실패 + A 퇴사 

내 입장에서는 (1)이 가장 찝찝하다. 우선 이직을 하려는 이유 자체가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같은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남겨진 사람들에 약간의 부채의식 비슷한 걸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의도치 않게 더 큰 부담을 떠넘기게 되는 꼴이었다. 이 경우 회사는 팀을 확실하게 리드할 경력자(A)를 구해야 한다. 내 자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테다. 사실 나는 신입을 뽑아도 충분히 대체될 수준이었기도 하고. 

(2)가 베스트다. 나는 원하던 곳으로 옮길 수 있고, A가 남아준다면 내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물론 A에게 미안한 마음이 좀 들겠지만, 그가 당장 퇴사 계획을 세워놓은 것은 아닌 듯하니 아무래도 (1)보다는 부채의식이 덜했다.

(3)은… 가슴이 좀 아플 뿐 찝찝함은 없다. 

현재 나는 (3)의 경로를 따라 구축된 우주에 살고 있다. A를 대신해 줄 분이 왔고 그는 경험이 풍부했다. 그에 비하면 초라할 게 분명한 나를 존중해주며 적극적으로 팀을 리드해 줬다. A의 공백은 금방 채워졌고 나도 이후 6개월 동안 그럭저럭 잘 다녔다. 어쩌다 보니 이직도 하게 됐고, 여차저차 적응해서 다니고 있다. (1)과 (2)의 우주에 살고 있는 아매오, 행복하니? 거기선 나도, A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커리어를 쌓고 있겠지?

그러고 보니 사회 속에 던져진 우리는 대체 가능성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닐까 싶다. 커리어 패스가 상하좌우 어느 곳을 향하든지 그 모양을 결정하는 요소가 대체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우린 항상 누군가를 대체하거나, 누군가에 의해 대체된다. 물론 여기서 '대체'는 수동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 판단에는 나의 지분도 들어간다. 예를 들어 A는 내가 이직에 성공했다면 퇴사를 미루려고 했다. 애초 자신의 퇴사와 후임자의 입사 사이에 짧지만 공백이 생겨도 괜찮다고 판단한 건 '아매오가 그 역할을 이 정도까지는 커버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얼만큼 대체할 수 있는가. 여기에 답을 내리는 과정에서 소속이 바뀌고 동료가 바뀌고 일이 바뀐다. 그러한 변화가 발생시키는 동력으로 이번에는 상품이, 기업이, 산업이, 사회가 변화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 변화에 맞춰서 변화한다. 사회는 거대한 큐브 같다. 정육면체의 모든 면이 같은 색이 되도록 끊임없이 회전하지만, 그와 같은 상태로 무한히 수렴할 뿐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회전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블럭이고. 대체 가능성을 생각하다 보면 항상 첫 알바를 그만둘 때가 떠오른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바로 다음주부터 근무에서 빠져야 했다. 일주일마다 스케줄 표를 만들어 공지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매니저와 알바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그런데 퇴사 면담에서 매니저는 이렇게 말했다.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대체 불가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중에 사회생활 하면 알게 될 거예요. 최대한 아매오 님 사정에 맞춰 선택하면 됩니다."

돌이켜 보면 사회 생활을 하는 데 있어 필요한 조언을 해준 최초의 선배가 그 매니저 아니었나 싶다. 그의 말은 '사회생활 하면 알게 될 거'라기보다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의 최초 세팅값이 됐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게 진리는 아니겠지. 하지만 맨손보다는 뭐든 들고 시작하는 게 좋잖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책상 한편에는 "반 년씩 텀을 두고 차례로 퇴사한 '전 직장 동료'" 둘의 명함이 놓여있다. 그 옆에 슬쩍 내 명함을 가져다 대봤다. 한때는 같은 명함을 썼던 이들의 이름이 제각기 다른 디자인의 명함에 인쇄돼 있다. 우리는 앞으로 몇 개의 명함을 더 갖게 될까. 내 명함만큼 이들의 명함도 꼬박꼬박 모으면 꽤나 재밌는 기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도비


제(3)의 우주에 살고 있는 아매오님이 커리어 우상향에도 성공하고 퇴사 이후에도 전 직장 동료분들과 잔을 맞대고 있는 걸 보니 참 보기 좋습니다. 물론, 제(1)의 우주나, 제(2)의 우주의 아매오님도 저 나름의 환경과 조건을 잘 헤쳐 나갔겠지만요.

이번 글은 노동자의 대체불가능을 가장 명랑하게 다룬 글이 아닐까 싶어요. 흔히들 ‘사람 많아~’라는 식의 부정적인 레퍼토리가 등장했을 텐데 말이에요. 그만큼 아매오님이 현재의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좋습니다. 대체불가능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때때로는 응원의 말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군가의 어깨를 가볍게 해줄 수 있다는 걸 아매오님으로부터 배워요. 대체 가능하지만 함께 하면 더 좋은 사람. 제(3)의 우주에서, 아매오님을 응원합니다. 



 

야망백수


아매오님의 ‘대체불가능한 사람은 없다’는 말은 현실적이면서도 우리를 과도한 책임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통찰입니다. 일리 있고 위안을 줍니다. 하지만 전 조금 무서워요. 이 통찰이 우리는 모두가 대체불가능한 유일한 존재라는 믿음을 완전히 대체해 버릴까 봐요.

물론 일자리에 한해서 말씀하신 줄은 알지만, 일과 밥벌이와 삶은 땔래야 땔 수 없게 얽혀있잖아요. 이 얽힘 속에서, 어떤 이들은 대체불가능한 인력이 아니란 이유로 존엄을 잃어버리기도 하구요. 모두가 정년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길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고용유연성을 마냥 긍정하기 위해선, 업무는 대체가능해도 사람은 모두 대체불가능한 존재임을 모두가 단 한순간도 잊지 않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균형감각만이 “대체불가능한 사람은 없다”가 “대체 가능하면 사람도 아니다”로 흑화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꼬장처럼 들리겠지만, 결국엔 닿아있는 문제라는 믿음으로 이렇게 딴지를 걸어봅니다. “대체 가능한 사람은 없습니다”

 

파주

잡스의 죽음 직후였죠. "이제 애플은 망했다"라는 말이 돌던 때 말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잡스 사후에 애플은 세계에서 시가총액이 가장 높은, 자타공인 1위 기업이 됐죠. 잡스 같은 희대의 천재도 대체가 가능하다는 건데, 자신이 제아무리 뛰어난 인재라도 대체불가능하다 말할 수 없겠죠.

다만 대체불가가 지칭하는 게 유능함이 아니라 아니라 태도나 방식을 말하는 거라면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전 직장에서 퇴사할 때였습니다. 맡고 있던 책을 어떻게 인수인계 해야 할 지 고민하던 제게 선배는 이런 말을 했주셨죠. "에디터마다 스타일이 전부 다르니까 지금 파주 씨가 공들여 편집한 것도 나중에 다 뜯어고칠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말고 마음 편히 회사생활 갈무리에 집중하세요." 고작 단어를 바꾸는 일 따위도 그러한데 복잡다단한 회사업무가 그보다 단순할리 없겠죠.

그래서 저는 '대체불가한'이라는 단어 앞에서 늘 각오를 다집니다. 누구나 나만큼 할 수는 있겠지만, 누구나 나처럼 할 수는 없을 거라고. 앞으로 그런 일꾼이 되자고.

 

 


 

 

밥벌이 에세이 <풀칠> 메일로 받아보기

 

밥벌이 에세이 풀칠 구독하기

잘난 거 없는 우리가 전하는 근근히 먹고 사는 이야기. 매주 수요일 밤 10시, 평일의 반환점에 찾아갑니다.

page.stibee.com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