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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루의 미학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1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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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야망백수

 

 오후 네시의 사무실.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난 지금 할 일이 없다. 아무리 확인해도 할 게 없다. 사무실 창밖으론 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다. 비 구경을 하며 동료들이 만들어내는 백색소음을 듣다 깨달았다. 오늘은 이제 월루라는 것을.

 살포시 의자를 밀고 탕비실로 갔다. 기쁘게도 누구도 내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믹스커피가 뜨거운 물에 녹아내리는 걸 거의 캠핑에 가서 불멍 때리듯이 바라봤다. '아삽(ASAP)'으로 할 일을 쳐내느라 바짝 긴장해있던 뇌도 조금은 흐물흐물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런 느슨함을 매일 누릴 수 있다면 아침마다 유산균이니 비타민이니 하는 것들을 털어 넣지 않아도 쌩쌩할 것이다.

 자리로 돌아와 별 의미 없는 문서 창 몇 개를 듀얼 모니터 양쪽에 적절히 분배해두고, 원래는 집에 가서 하려고 했던 귀찮은 일(떨어져 가는 생수 구매, 며칠 전부터 웹 화면 한쪽에 계속 뜨며 마음을 어지럽히는 인강 상세페이지 탐독 및 장바구니에 넣어두기) 몇 개를 처리했다. 연봉협상 테이블에서 회사에 팔아치운 줄 알았던 시간이 기특하게도 돌아온 덕분에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시간까지 늘어난 셈이다. 예상치 못한 행운, 세렌디피티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콧노래를 애써 참으며 생각했다. '개이득...'

 그때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으로는 신경이 쓰였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무진 애쓰며 일하는 척을 했다. 다행히 팀장은 내게 별 관심을 주지 않고 어디론가 나갔다. 어쩌면 그도 월루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짧은 긴장상황은 월루의 아름다움이 단순히 경제적 이득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월루는 속임수다. 일하지도 않으면서 일하는 척을 하는 이런 기망행위다. 이게 통한다는 것은 회사는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우리는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노예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닌가? 월루하는 직장인은 21세기 버전의 오디세우스다. 외눈박이 거인의 동굴 안에 갇혀있지만 거인의 양 떼를 잡아 포식하는...

 저항의 카타르시스를 탐닉하는 동안(흐리멍덩한 눈으로 커피를 홀짝이며, 사무실로 돌아온 팀장의 눈치를 보며 종종 의미 없는 마우스 클릭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꾸준히 흐른다. 어느새 5시다. 이제 슬슬 배가 고프다. 배고픔은 평소엔 잊고 있지만 늘 존재하는 또 다른 나, 몸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일터에서 몸을 생각하는 것은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이 낯섦은 평소엔 전화와 메일과 회의와 숫자들에 파묻혀 있느라 몸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기에 드는 기분일 수도 있지만, 이전엔 보이지 않던 세계관의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점을 마주했을 때 드는 것일 수도 있다.

 일터에서 몸의 배고픔을 생각하는 것은 일의 의미를 밥벌이로 재구성해낸다. 그리고 '밥벌이'는 각자의 인생엔 이뤄내야만 하는 목표가 있으며 일을 통해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동시대의 신화가 갖고 있는 진지함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오후 5시의 사무실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며 인터넷 쇼핑을 하며 배에서 꾸르륵 소리를 내는 것도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여정인가? 나는 당장 나의 성장을 위해 게으름을 반성하고 퇴근이 한 시간 남은 이 시점에 자발적으로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할까? 정말?

  어쩌면 우리가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는 이유는 '자아'라는 것을 너무나 열심히 찾아다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잘러'를 지나치게 선망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밥벌이를 위한 소박한 몸짓에도 아름다움은 존재한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사무실 안으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만약 밀레가 동시대인이었다면, 그는 이삭 줍는 농부들 대신 블라인드 틈새로 오후 5시의 주황색 햇빛이 들어오는 사무실에서 월루하는 직장인들을 그렸을 것이다. <시간 줍는 직장인들> 같은 제목을 붙여서. 일의 의미를 '자아의 실현' 대신 '밥벌이'에서 찾는 것은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도한 인생의 무게를 덜어내는 테크닉이다. 월루는 그 테크닉을 연마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가 월루라는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타인의 희생 덕분일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앞자리에서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 동료나 외주업체의 누군가가 갈려나간 덕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장이 내게 지불하는 돈보다 적은 일을 시킨 것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희생이긴 희생이다. 월루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다. 옛사람들이 식사를 앞두고 천지신명의 몫으로 밥 한 숟가락을 던지며 고수레라고 외쳤듯이, 우리도 쇼핑을 하거나 주식차트를 보기 전에 어떤 식으로든 전 세계의 경제활동인구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해 마땅한 일인지도 모른다.

 잡생각을 마치고 시계를 봤다. 5시 30분. 이렇게 대차게 생각의 사치를 누렸는데도 여전히 사무실은 평화롭다. 오늘은 이대로 퇴근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남은 30분 동안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 월루 밖에 없음에 가슴속에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쓸모없는 파일들을 휴지통에 처넣었다. 15분 뒤엔 텀블러를 씻으러 갈 것이고 한 시간 뒤엔 전철에서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고 있을 것이다. 오늘 퇴근길은 월루 덕택에 피로와 회한 대신 산뜻함과 설렘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마감도비


업무 차 여의도에 갈 때면 항상 잠깐이라도 한강을 걷곤 합니다. 월루를 하기 위해서요. 아니, 더 정확하게는 '나는 월루를 하고 있다'라는 감각을 느끼기 위해서요. 일종의 보상심리죠. 아직 일이 남아있으니 마음이 그리 편한 것도 아닌데. 휴식이 휴식이 아니고 보상이 되는 하루는 참 서글픕니다. 우리 모두는 너무 성실하구요. 회사더러 '시간루팡', '건강루팡' 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요. 이렇게 된 거 우리 시간이든 월급이든 더 쓸어담기로 해요. 월루, 화이팅입니다!

 

 

아매오


군 복무 시절이 떠오릅니다.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라는 매커니즘에 철저히 따르긴 했지만 20대 초반의 소중한 698일이 허공에 흩날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무력감은 아직도 생생하네요. 다만 그 시간은 단지 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죠. 시간은 가만히 놔둬도 원래 흐르는 것인데, 그저 흐른다는 사실만으로도 제 가치를 다하다니. 내가 이런 시간을 평생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인생에서 드문 경험 아닐까? 월루의 감각은 정확히 그 시절을 상기시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임금은 계산되고 있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전역일은 다가오고 있다는 것. 개이득. 참말로 중독적인 감각입니다.

 

파주

요즘 '동료의 땀을 탐하지 말라'라고 주창하는 곳에서 일하는 저는, '월루'라는 말이 서늘하게 다가오네요. 월루가 꼭 동료의 땀을 탐해서 얻은 꿀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 지금 나는 월루구나라는 여유를 자각할 때면 마음속에서 경고알람이 켜지거든요. '야, 너 내일 X됐어.' 

물론 저 또한 월루의 달콤함을 느껴본 적이 있지만요. 바바현(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이 실사화된 이곳에서 여유를 만끽한다는 건, 그저 '현재의 나'가 '미래의 나'에게 업무를 미루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매주 하는 짓이지만요. 아주아주 가혹한 일입니다.

하지만 변명을 해보자면 일 잘하는 사람들이 또 쉴 때도 기똥차게 잘 쉬지 않습니까? 그러니 단비처럼 찾아오는 월루의 순간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일잘알'의 덕목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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