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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어긋난 사람들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13.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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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아매오

 

한눈팔다 신도림역에 내리지 못하고 지나칠 때까지만 해도 조금 귀찮은 상황이 됐다고 여겼을 뿐이다. 딱 한 정거장만 되돌아 오면 되는 데다 오늘은 자체적으로 5분 조기 퇴근 하면서 평소 타던 것보다 10분 일찍 전철을 탔기 때문이다. 대충 봐도 신도림역으로 돌아가 인천행 전철로 환승하기 위한 시간은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기껏 서둘러서 나왔는데 집 도착하는 시간은 비슷하겠네. 으이구, 이 멍청한 작자야…'

스스로를 가볍게 타박하며 반대 플랫폼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쪽 전철도 막 도착했던 모양인지 사람들이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지친 얼굴들 사이를 헤집고 황급히 뛰어올랐지만 문은 이미 닫힌 상태. 혹시 다시 열리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전철은 이내 저 멀리 떨어진 도시 불빛을 향해 꼬리를 돌려 사라졌다.

배차 간격을 풀타임으로 기다려야 한다 생각하니 마음이 약간 불안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막차를 놓치겠어? 얼른 앱을 켜서 인천행 전철 시간을 찾아봤다. 막차는 11시 29분. 이상하다. 분명 더 늦게까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 11시 15분이니까 넉넉하군. 곧바로 신도림역으로 가는 전철을 검색했다. 11시 27분. 뭐야? 왜 이렇게 늦어?

땀샘이 폭발했다. 지연되지 않고 딱 맞춰 들어온 전철을 타고 신도림역으로 가서 전속력으로 뛰어 환승 플랫폼으로 가는 데까지 2분? 이건 불가능한 얘기였다. 머릿속으로 그런 시뮬레이션을 돌리면서도 손으로는 이미 집 근처까지 가는 야간 버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택시를 타는 미친 상황이 오지 않길 바라면서.

전철은 놓쳤지만 다행히 버스는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정거장을 지나친 죄로 평소보다 한 시간 더 늦게 귀가하는 건 여전히 억울한 일이었다. 루틴에서 겨우 한 발짝 벗어났을 뿐인데 이렇게 커다란 대가를 치러야 하다니? 안온하다 믿었던 일상이 사실은 절벽 위에 아슬하게 걸쳐 있었다는 걸 알고 나니 모든 게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게 다 얼마 전부터 변경된 근무 시간 탓인 셈이다. 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2시부터 11시. 출퇴근이나 주말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인 타임 테이블에 약간 어긋나 있다. 근무 시간에 대해 얘기하면 지인들은(물론 예전의 나조차도) 대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장단점은 있겠지만 적응하기 힘들겠다."

생각보다 장점은 많다. 우선 추가 근무가 없다. 할 일이 남았는데 퇴근하는 데서 오는 찝찝함에 비해 할 일이 많아서 일찍 출근해야 할 것 같다는 걱정을 이겨내는 게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내 좌우명은 '어떻게든 되겠지'다). 어쩌면 나, 생산성이 조금은 올랐을지도? 게다가 태생적으로 아침형 인간이라 저녁보다는 오전의 자유시간이 더 좋다. 

사람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 정도를 빼면 단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마저도 시국이 시국인지라 기회비용이 크게 낮아진 상태라 크리티컬한 부분이 없다. 크게 줄어든 술자리가 아쉽긴 하지만 시간을 보내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우는 계기로 삼았다. 나, 취향이 조금은 다양해졌을지도? 대충 각오했던 것보다 상황이 괜찮다는 얘기다.

핵심은 '적응하기 힘들겠다'라는 말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평일'과 '나인 투 식스(9 to 6)'라는 거대한 틀은 사회인으로서의 개인이 살아가는 보편적인 세계다. 그리고 거기에 어긋난 사람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어긋난 사람들을 위한 세계는 없다는 사실을. 보편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그건 유일한 전부였다. 

서울 수도권에 적용된 거리두기 4단계 방역 수칙은 오후 6시 이후 3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를 포함한다. 정부는 '오후 6시'에 대해 '경제활동이 종료되는 시간을 기준으로 퇴근 후 바로 귀가하는 등 외출을 금지하고 집에 머물도록 하는 의미의 조치'라고 설명했다. 밤 10시 이후 전철 배차 간격과 막차 시간 조정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보편은 누구의 것인가. 물론 사회 정책은 이미 형성된 지형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특히 이번처럼 긴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것일 경우엔 더더욱. 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재택근무할 수 없고 그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최소한의 일상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건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지 않나.

당연하지만 내가 겪은 불편이 누군가에게는 불편 축에도 못 낄 것이다. 심지어 거리두기 이전부터 이미 이런 불편을 겪어온 사람도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깨달았다. 역지사지는 선한 의도나 개별적인 의지만으로 닿을 수 없었다. 결국 나도 내 세계의 보편으로 끌려 들어가는 인간이니까.

막차 놓쳤다고 억울해서 쓰는 글이 맞다. 하지만 달라진 일상의 타임 테이블에 골몰하다보니, 이미 다른 일상의 타임 테이블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이런 저런 질문으로 떠올리게 된 것도 맞다. 약간 어긋난 사람들과 그들의 일상. '너무 니치하다'거나 '매스하지 않다'라는 피드백의 행렬 속에서 나는 그것들에 대한 감각을 퇴화시켜버렸던 걸까.


마감도비


'9 to 6'라는 세계에 갇혀있다 보면 확실히 세계가 좁아지는 거 같아요. 작년 11월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한낮의 거리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걸 보면서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아니, 뭐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 나만 갇혀있었던 거야?’ 하면서 말이죠.

그 다음부턴 점심을 사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일부러 가보지 않았던 골목길을 걷기도 했어요. 몰랐던 풍경이 참 많더라구요. 어린이 친구들은 가방을 메고 씩씩하게 하교를 하고 있었고 어르신들은 골목 어귀에 의자를 들고 모여 앉아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저마다 하루를 보내는 방식과 속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죠. 얘기를 들어보니 최근에는 ‘9 to 6’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많더라구요. 재택근무나 탄력근무로도 업무가 어느 정도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기 때문이 아닐까요. 물론, 근무는 근무지만요. 우리가 하루를 보내는 방식이 좀 더 다채로워지면 참 좋겠어요. 

 

 

야망백수


보편이라는 말을 들으니 모파상과 플로베르의 대화가 떠오르네요. 플로베르는 제자 모파상에게 “온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두 알의 모래는 없다”고 했다죠. 보편적인 표현은 반드시 대상이 가진 특별함을 누락시키고 마는 게으름이라구요.

플로베르의 문장론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완전히 똑같은 두 알의 모래가 없듯이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삶을 살고 있는, 뭉뚱그려질 수 없는 고유한 존재니까요. 그러니 삶의 방식에 '보편적인' 잣대를 들이밀어 누락된 이들을 만드는 것 또한 게으름이겟죠.

물론 매 순간 번뜩이는 문장을 쓸 수 없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두를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전 보편이라는 핑계로 게을러지는 것 만큼은 피하고 싶어요. 세상에서 오직 자기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만큼 서러운게 없잖아요. 다들 외롭고 먹고 살기 힘든 마당에 그런 상처만큼은 주지도 받지도 않고 싶어요. 많이 부지런해져야겠네요.

 

파주

고작 며칠 전 출근길이었죠. 제 눈앞에서 지하철 문이 닫히는 장면을 직관한 게 말입니다. 평소에는 마치 사우론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듯한 출근길 열차 문이 그날따라 왜 이리 애틋하게 보였을까요. 여튼 고작 3초 차이로 열차 하나를 놓친 탓에 그날은 30분이나 늦은 퇴근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미뤄둔 유튜브 영상 하나를 봤고, 영상 속에 등장한 책 한 권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그날 영상에 나왔던 그 책은 '제 인생의 책'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게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오히려 좋아'일까요. 망했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행운을 길어올린 셈이니까요. 팔자 좋은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가끔 이런 정신승리가 도움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아매오님만 해도 한 시간 유예된 퇴근길 덕분에 이렇게 에세이 한 편을 완성시키지 않았습니까? 자, 이 말을 외치면서 정신승리 해봅시다.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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