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 파주
#1
회사에서 처음 '퇴사'라는 말을 입 밖으로 냈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키보드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사무실을 가로질러 부서장의 자리 앞에 멈춰 섰고, 이내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아까 화장실에서 거울 보며 연습했던 여유로운 모습 그대로 ‘저 퇴사하겠습니다’를 외쳤다. 아니, 계획은 분명 그랬는데 눈이 마주치자 퇴사하겠다는 말을 렉걸린 PC 마냥 떠듬거리고 말았다.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간신히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가까스로 성공했고, 둘 사이로 10초 정도의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진 완벽한 동상이몽.
(상사 : 얘는 하라는 마감은 안 끝내고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지끼는 거야.)
(나 : 아니, 몇 달을 퇴사할 거라고 잔뜩 티내며 다녔구먼. 이 양반은 왜 당황스러운 척 쳐다보는 건데.)
온갖 생각이 들던 찰나, 먼저 침묵을 깬 건 상사 쪽이었다.
“너는 무슨 퇴사한다는 말을 '점심에 뭐 먹을까요?’라는 말처럼 하냐?”
당장의 답변을 미루는 동시에 위트가 섞인 답변. 역시나 고단수였다.
#2
퇴사한다는 말을 메뉴 고르듯 건넨 탓인지, 그날 점심 국장님과 백반정식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야 했다. 몹시 민망하면서도 서먹한 자리였는데 그중에서도 본론을 꺼내드는 게 가장 어려웠다. 일을 잘하지도, 그렇다고 의욕적으로 덤벼들지도 않았던 터라 퇴사한다는 말 한 마디면 미련 없이 빠이빠이 하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퇴사를 결심한 이유를 꽤나 소상히 설명해야 했다.
“아 그러니까, 저는 내향적이라 사람들 만나고 다니는 게 뒤지게 힘들어요. 아무래도 적성이 아닌가 봐요. 그럼 안녕히...”
“괜찮아. 사람 만나는 건 나도 힘들어. 계속 하다보면 버틸 만 해.”
“그것만이 아니라요... 글 쓰는 게 도통 늘지 않는 것 같고... 여차저차 하여 여기와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듯합니다. 정말로 안녕히.”
“괜찮아. 기사 쓰는 건 꾸준히 하다보면 늘어.”
능력부족을 자책하며 밝힌 퇴사의사는 경험부족을 근거로 반려됐다. 당사자가 괜찮지 않다는데도 한사코 괜찮다는 말로 우주방어를 펼칠 줄이야. 결국 가고 싶었던 회사의 채용공고를 봤고, 그곳으로 이직하기를 결심했다는 말까지 털어놔야 했다. 동공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결심한 듯 그동안 고생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뜬금없는 당부 한 마디도 덧붙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다음 회사에선 점심식사는 꼭 팀원들이랑 같이 먹어라.”
#3
첫 회사에서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업으로 삼을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과 업이 된 바람에 별 수 없이 여행을 해야 하는 집돌이 사이에는 좀처럼 넘기 힘든 간극이 존재했다. 물론 저마다 가진 삶의 철학이야 다를 수밖에 없다지만, 스몰토크마저 자주 방향을 엇나갔다. 간신히 꺼낸 수십 발의 화두가 무용으로 돌아가 버리니, 제아무리 강철멘탈이래도 대화 의욕을 잃을 수밖에. 의도적으로 회사 사람들과의 사적인 시간을 회피하게 됐다. 점심시간이 특히 고역이었다. 매일 점심시간이 다가올 참이면 ‘오늘 도통 입맛이 없어서요’라고 둘러대곤 회사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끼니를 대충 해결하거나 파워워킹으로 청계천 일대를 돌았다. 비나 눈이 내려 상황이 여의치 않은 날이면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도 했다. 굶주림은 기꺼이 견딜 수 있었지만 식탁 위에 놓인 1시간 분의 어색함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퇴사 직전 받은 그 조언이 퍽 인상적이어서 회사를 옮긴 뒤에는 밥때가 되면 사람들을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팀원들과 식사를 같이 하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얻게 되는데, 각자 담당하고 있는 업무(대화의 공백을 매우기 가장 쉬움), 업무처리 중 힘든 점(때때로 해결책을 듣기도 함), 외주 작업비용에 대한 고민(알음알음 좋은 외주자를 소개받기도 함) 등 당장의 업무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 꽤 많다.
물론 위계가 정해진 상사와의 시간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근로시간에 들어가지도 않는 온전한 내 시간인데 굳이 업무시간처럼 보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만 점심시간이 일주일에 5일, 하루 8시간 넘게 한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가장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는 시간이라는 건 이제 안다. 퇴사하는 막내 직원에게 구태여 ‘다른 회사에서는 팀원들과 밥을 먹으라’는 조언을 건넨 이유가 있었다. 회사 동료와 친구가 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역시나 적당한 거리는 필요하니까. 적당한 거리라는 건 적당히 먼 동시에 적당히 가까워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대체로 즐겁고 배울 것도 많지만, 문제는 대화가 툭툭 끊겨 정적이 흐르는 날이다. 일말의 침묵도 견디지 못하는 괴랄한 성격 탓에 할 말이 떨어지면 주제가 사적인 얘기로 흘러가기도 한다. 프라이버시의 기준이야 제각기 다르다지만, 가끔은 스스로 정한 선을 넘어버리는 실수를 범한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고, 궁금해 하지도 않는 내 이야기를 꾸역꾸역 해버린 날이면 머리를 감다가 뒤통수를 벅벅 긁어내며 욕설을 뱉는다.
‘어휴 씨이벌, 그런 말은 또 왜 해가지고...’
#4
같은 실수를 반복하다 보니 나름의 요령까지 체득했다. 대화 소재가 바닥났을 때 단번에 전환시키는 스몰토크를 던지는 거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가 얼마나 망했는지부터 넷플릭스 상영작이 얼마나 잔인한지, 스타벅스 핑크색 레디백을 구하려면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야 했다 등등. 주제는 다양할수록 좋다. 침묵이 다가오는 불안함이 느껴질 때면 잽싸게 짱구를 굴리기 시작한다. 주어진 시간은 대략 5초 정도. 출근길에 읽은 뉴스, 주말에 본 넷플릭스 영화의 줄거리를 쥐어짜내 툭 하고 식탁 위로 올리는데, 그걸로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발을 동동 구르며 다음 주제를 고민한다. 외향충들이야 대화를 유려하게 이끌어 가는 게 패시브 스킬처럼 갖춰져 있겠지만 내향충에게는 스몰토크를 하는 것도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니까.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출근을 앞둔 일요일 저녁이면 넷플릭스를 켜고 ‘가장 핫 한 콘텐츠’를 부지런히 찾는다.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적당한 투자다. 시즌제는 너무 설명이 장황해지니 분량이 짧고 어렵지 않은 내용이 딱 좋다. 지난 주말에도 넷플릭스에서 스몰토크용으로 제격인 코미디 영화를 찾았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법한 내용인데다 가볍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다가올 점심시간, 식탁 위에 침묵이 흐른다면 이 영화를 화두로 던져보려고 한다. (2020.07.15)
직장 선배들과 친해지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야구 뉴스를 읽어야 하나 고민하는 저로서는 ‘파주’님의 노력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역시 안 될 거 같아요. 저는 오늘도 약속이 있다는 말만을 남긴 채 허겁지겁 사무실을 빠져나와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고깃집에서 혼자 점심 특선으로 냉면과 갈비만두를 먹었거든요. 아주 맛있진 않았지만 만족스러웠습니다. 편했거든요.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는 한 손에 스타벅스 커피를 쥐는 것도 잊지 않았어요. 마치 친구와 만족스런 식사를 마치고 왔다는 듯이요. 불편한 듯 편안한 이 시간이 저는 싫지가 않네요. 누구나 숨 쉴 구멍은 있어야 하잖아요.
팀원과 밥 먹을 때만이라도 ‘일말의 침묵’을 참는 게 목표였어요. 입이 근질거리면 뭐든 쑤셔 넣었습니다. 소리는 안 났지만 입 모양은 이랬을 겁니다. “나 뭐 먹고 있는 거 보이지? 그러니 누가 대신 이 공백을 채워줘!” 하지만 그걸 채우는 건 언제나 저였죠. 그래도 전 사적인 얘기를 잘 늘어놓는 편입니다. 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이 없는 집에서 여름을 날 걱정이나 주말에 나간 소개팅 후기 같은 것들요. 딱히 후회도 안 해요. 아무것도 아닌 그 이야기들이 ‘일로 만난 사이’를 ‘일이 아니어도 만나는 사이’로 바꿔주더라고요. 지금 저는 팀원들에게 선 긋기 달인으로 통하지만, 혼자 느끼는 내적 친밀감은 매일 최고치를 경신합니다. 소속이 달라지면 한꺼번에 터져 나오겠죠. 제 마음을 알아들 주면 좋겠어요. 파주 님도 그런 팀원이 하나쯤 있었을 겁니다. 스몰토크를 위해 뭘 하지 않아도 되는. 힘내세요.
지금은 때려치고 나온 전 직장에선 점심시간이면 팀원들과 빈 회의실에 기어들어가 넷플릭스를 봤답니다. 밥도 먹고 넷플릭스도 보려니 대화가 오갈리가 없죠. 회식도 따로 없고 회의도 없는 회사였어서 함께한 시간 대비 서로에 대해 아는 건 놀라우리만큼 적지만, 회사를 관둔지 석달이 지난 지금도 모든 팀원들을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대화가 있는 식탁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파주님은 본투비 내향인이라고 하셨는데 애써 대화의 화두를 던지려고 바둥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냥 입 꾹 닫고 혼자 나가서 떡볶이나 사먹고 오는게 더 행복한 길은 아닐까요? "점심식사는 꼭 팀원이랑 같이 먹어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야 밸런스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점심식사는 팀원이랑 같이 먹던 말던 하고 싶은대로 해라" 제가 밸런스를 맞췄습니다. 파주님의 행복한 회사생활을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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