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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 : 나만의 성과지표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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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아매오

 

한동안 “대기업 신입으로 들어가고 싶다”라는 얘기를 자주 했다. ‘사수가 없는 상황’에서 비롯되는 아쉬움이나 불만이 가장 컸다. 직무나 분야에 대한 지식은 둘째 치고, 사무직 노동자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업무처리방식(메일쓰기, 미팅, 회의, 업무량 조절, 일정 관리 등)을 터득하는 데서부터 자잘한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돈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회사가 배우는 곳이냐?’ 라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아무래도 ‘일’이란 게 인풋보다는 아웃풋에 초점을 맞추는 개념이니까. 엄밀히 얘기하면 이런 ‘기본적인 업무처리방식’은 개개인의 센스에 달린 문제기도 하다. 대기업이라고 반드시 체계적인 교육 환경을 갖췄다고 볼 수도 없다. 저마다 다른 형태의 어려움 또한 있을 테고.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상 그냥 판타지라는 거다. 그러니 내 푸념은 말 그대로 푸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오케이, 양보. 하지만 업무처리방식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남는다. ‘일하는 사람들의 콘텐츠 플랫폼’을 기치로 내세운 ‘퍼블리’에서 메일·보고서 작성법, 시간 관리법, 상황별 마인드컨트롤 팁 같은 아티클이 꾸준히 발행되는 것만 봐도 이런 고민이 아주 특수한 사례는 아닐 거라 짐작할 수 있다. 비효율적 보고 체계에 답답해 하고, 비생산적 업무 지시에 열 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어떻게 일할 것인가?”라는 커다란 물음을 끌어 안고 사는 셈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신경 쓰는 건 ‘메일 쓰기’다. 섭외나 제안이 많은 업무 특성상 먼저 메일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당연히 답장을 못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난 그때부터 온갖 불안과 자조에 휩싸인다. ‘내가 제안한 내용이 흥미를 돋구지 못 했나?’, ‘내용을 쉽게 풀지 않아서 읽다가 꺼버렸나?’,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가 별로였나?’ 등등. 일에 대한 평가와 인간에 대한 평가를 따로 봐야 한다던데, 그 짓을 내가 나에게 하고 있으니 어디 가서 억울하다고 할 수도 없다. 사실 억울하지도 않다. 아니, 억울할 시간도 없이 고민들이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고민의 내용은 이랬다. 메일은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한 글이다. 텍스트를 다루는 게 일이면서 동시에 취미인데(=시도 때도 없이 읽고 쓰는데), 유일한 타깃의 리액션도 못 끌어낸다면 그리고 그런 상황이 부끄럽지 않다면 일찌감치 다른 길 찾아 봐야 하는 거 아닐까. 메일 하나 설득력 있게 못 쓰는 에디터와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내 메일을 받는 사람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그 메일이 가장 와닿는 포트폴리오가 아닐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많은 메일을 뜯어봤다. 제목은 어떻게 쓰는지, 인사는 어떻게 하며 메일 수신자를 뭐라고 부르는지, ‘프로젝트 진행하느라 고생 많으셨다’ 같은 스몰토크는 어느 정도 사이일 때 하면 좋을지, 문단은 어디서 나눌지, 어떤 순서로 내용을 전달할지, 마무리 인사는 뭐라고 할지, 심지어 ‘감사합니다.’와 ‘아매오 드림.’ 사이 한 줄을 비울지 말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까지 살폈다. 포트폴리오를 조금씩 고쳐가듯이 새로운 메일을 보낼 때마다 여러 요소를 넣거나 빼곤 했다.

그 날도 출근해서 보도자료를 비롯한 여러 메일을 읽었다. 오전 업무를 마친 뒤에는 모 브랜드 홍보담당자와 점심을 먹었다. 꽤 오랫동안 메일만 주고받았는데 어쩌다 기회가 닿아 처음 얼굴을 마주한 자리였다. 이런 저런 대화(회사 일 말고도 뭘 하긴 해야 할 거 같은데 뭐 해먹고 살죠? 웹소설을 써볼까요?)를 나누던 중 경력 얘기가 나왔다. 쪼렙인 나는 쭈뼛쭈뼛 ‘이제 좀 있으면 만 1년이 된다’고 털어놨다. 후식으로 나온 녹차를 마시던 그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엥? 저는 메일 쓰는 거 보고 그래도 3년차는 된 줄 알았는데.”

안다. 나도 안다. 립서비스가 아닐 리 없다는 거. 그에겐 메일로 드러나는 내 모습이 전부일 테니 사실상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립서비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일말의 진심 또한 포함돼 있었으리라 믿는다. 음, 오케이. 양보. 이렇게 하자. 그건 적어도 그때 내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불안감에 흔들리는 나를 긍정하기 위해 필요한 딱 적정량의 칭찬. 그의 말 한 마디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좋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내가 아주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니구나’ 라고 여길 작은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앞서 말했듯 내게 메일은 포트폴리오와 같았다. 일종의 바로미터다. 내가 ‘내 일’에 얼마나 욕심을 갖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는지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라 여겼다. 근데 어디 메일만 그럴까. 모두 저마다의 성과지표 하나씩은 갖고 있다. 일하면서 특히 신경 쓰게 되는 것, 그걸 달성하기 위한 노력.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듯 보여도 누군가에겐 어떤 지속가능성을 부여해주는 것. 나는 그런 것들이 모여 안 되는 일을 되게 한다고 믿는다.(2020.07.22)


마감도비


사무직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업무처리방식을 배우고 싶었다는 아매오님의 말에 백번 공감합니다. 저도 신입사원 워크숍을 통해 조직 내 업무 프로세스를 학습하도록 하는 기업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거든요. 지금이요? ‘메일은 주소만 안 틀리게 잘 보내면 됐지 뭘 더 바래?’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 ‘일잘러’하니까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요. 조금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직장인이 된 친구들과 명함 주고받는 리액션 가지고 술자리에서 한참을 떠들고 놀았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다들 치열하게까지는 아니어도 ‘일잘러’가 되고 싶은 욕심은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 욕심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맞나 싶으면 잘 배워가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배포를 부려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파주


창검을 든 무사들은 첫 합을 주고받으면 단번에 상대의 실력을 간파할 수 있다고 하던데요. 저는 직장인에게 있어 첫 합이 메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해요. 메일의 제목이나 인사말만으로도 그 사람이 좁밥인지 고수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거든요.

잘 쓴 메일이라는 것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공손한 말로 필요한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 글이 좋은 메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끔 사려깊은 말투로도 사안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메일을 받을 때면 기쁜 마음이 들곤 합니다. 표본으로 삼을만한 좋은 메일이 하나 더 생긴 거니까요. 

동시에 그런 메일을 받을 때마다 괴로워하며 답장을 작성하는 데에 한참의 시간을 들여요. 어떻게 하면 내가 좁밥처럼 보이지 않을까, 고민하면서요. 지금까지 수 천 통의 메일을 주고받았지만 여전히 메일 쓰는 일은 늘 낯설어요. 내가 원하는 것을 100% 드러내면서 상대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전달하는 메일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걸까요? 아마 팀장직을 달게 될 때까지는 이 문제로 괴로워하지 않을까 싶어요.  

 

야망백수


아매오님의 메일깎는 노인과도 같은 모습을 보니 그 프로다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네요. 존경합니다. 그러나 거인의 뒷모습은 필부들에게 짙은 그림자를 남기는 법. 백수인 제가 그 그림자에 침을 한번 뱉어보렵니다. 별생각 없이 메일 쓰는 이들을 위한 <대충맨을 위한 변명>

메일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메일은 뭘까요? 커뮤니케이션 수단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왜 하지?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일은 어떤 의미인가? 이 단계에서 대충맨과 메깎노(메일 깎는 노인)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일의 의미가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면, 그 수단의 수단인 메일엔 최소한의 노력을 투자하는 것이 지극히 효율적인 행동입니다. 즉 대충맨이 되는 것이 나름의 합리성을 가진 선택인 것이죠. 반면 일을 통해 무언가 이루고 싶은 야망이 있다면 메일은 그 자체로도 업무 퍼포먼스의 하나로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메일을 자신만의 성과지표로 삼는 아매오님처럼요. 이 경우, 메일이 수단이 아닌 목적이니 메일에 많은 고민을 투자하는 메깎노가 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이렇게 대충맨과 메깎노 모두 일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나름의 합리성을 갖는 선택지이지만, 그 평판은 천지차이입니다. 대충맨은 무능하고 설렁설렁 시간만 때우는 월급루팡으로 '교정의 대상' 취급을 받는 반면 메깎노는 책임감있는 동료, '프로', 일잘러 등등 온갖 좋은 소리는 다 들으며 '바람직한 상태'로 여겨집니다.

이건 대충맨에겐 다소 억울한 상황입니다. 단지 회사에 돈을 벌러왔을 뿐이고, 그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을 뿐인데 뭔가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찝찝함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죠. 회사에 돈만 벌러 가는 건 나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요. 모두가 자아실현을 위해 일을 구하는 세상이면 좋겠지만 그건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저는 이 상황에서 현실과 매트릭스 사이의 심각한 괴리를 봅니다. 대충맨을 위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고 메깎노를 위한 언어만 존재하는 느낌이랄까요? 책임감이니 자아실현이니 하는 단어들은 대충맨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메깎노가 되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합니다. 대충맨으로 사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지임에도 불구하고요. 세간에 넘쳐나는 "책임감을 갖고 프로일잘러가 되어라!"라는 목소리들은 어딘지 "주인의식을 가져라!"라고 말하는 ㅈ소(중소)기업의 래파토리와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요? 어쩌면 사회적으로 대충맨은 그르고 메깎노는 옳다는 식의 가스라이팅이 행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물론 "야 대충맨 너 때문에 남이 피해를 보잖아ㅡㅡ"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만 이건 몹시 정교하게 따져봐야할 사안입니다. 어디까지가 대충이고 어디까지가 피해인지 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뭐 발주를 잘못 넣었다던가 하는 중대한 실수라면 논쟁의 여지가 없겠지만 일처리 자체엔 문제가 없는데 단순히 나만큼 열심히 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쁠 때, 비난의 정당성을 위해 '피해를 끼친다'라는 논리를 동원하는 경우도 분명 직장 생활엔 비일비재하니까요.

대충맨은 이렇게나 고용주 및 동료의 비난에 노출되기 쉬운데다가 메깎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번민하는 고단한 존재입니다. 게다가 일잘러가 되어라!라는 가스라이팅은 단순히 심리적인 압박에 그치지 않고 물질적인 위협으로 진화할 가능성까지 갖고 있습니다. 대충맨의 메커니즘은 제값을 안쳐주니 돈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는 건데 이게 역으로 제값을 안쳐주는 이유로 둔갑하는 것이죠. 먹고 살려고 돈 버는건데 제값을 안쳐주면 잘 못 먹고 살게 됩니다.

개소리가 길었네요. 정리합니다. "대충맨님 고개 드세요, 당신 잘못한 거 아닙니다." 동료와 고용주를 만족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겁니다.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의미에 정합하는 합리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비단 메일뿐만 아니라 일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 스트레스가 일을 더 잘하고 싶은 내면의 욕망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외부의 강박에서 온 것인지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는 게 어떨까요. 그리고 누군가 왜 너는 메깎노가 아니냐고 지랄한다면 그분과 담배 한 대 태우며 과연 우리에게 메깎노가 합리적인 선택지가 될 만큼의 보상이 주어지는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보셔요. 저는 카카오나 삼성같은 대기업이 아니고서야 지랄하는 자와 지랄받는 자 모두가 메깎노가 될 만큼의 보상은 못 받고 있지 않나...라고 생각합니다.

일견 '메일 대충 쓰자'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 같지만 저의 본심은 강박에서 자유로워지자는 것임을 개떡같이 말하긴 했지만 찰떡같이 알아봐주십시오? 다 같이 행복의 나라로 가는 그날을 바라 마지않으며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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