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 : 파주
#1
키보드 소리와 한숨 소리가 반복해 들려오는 사무실. 우렁찬 전화벨이 울릴 때면 몸이 절로 움츠러든다. 가뜩이나 지난달부터 회사의 대표전화를 넘겨받는 바람에 애먼 사람들의 전화를 받는 일이 잦아졌다. 평균적으로 통화하는 시간과 그들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도 대폭 늘었다.
마음 같아서는 귓구멍에 노이즈캔슬링 성능이 빵빵한 이어폰을 박아놓았다며 전화벨을 모른 척하고 싶지만, 꼬두바리 자리에 착석한 탓에 미적거릴 여유가 없다. 전화벨이 채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수화기를 들고 애써 반가운 톤으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사입니다."
이내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생활의 달인>을 보면 15년간 같은 일을 해온 달인이 초인 수준의 썰미를 가지고 있던데, 전화 셔틀 3년 차에 접어든 덕분인지 첫 마디로도 대강의 견적이 나온다.
통화시간이 5분 이상 소요될 사람인가, 15년도 전에 절판된 책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며 다짜고짜 화를 낼 작자인가, 어찌하여 내 원고를 채택하지 않느냐며 담당자의 전두엽 회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게 맞는지 몹시 궁금하다는 호기심 천국 빌런일 것인가. 이런 전화를 받을 때면 ‘문의하신 내용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허허’라며 다른 부서로 전화를 넘겨버리곤 전화선을 냅다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2
불행인지 다행인지 발신처는 경영지원부였다. 경영지원부로부터 전화를 받는다는 건 제출한 계약서에 오류가 있다거나 지출 결의서를 작성한 내용이 틀렸다거나, 아무튼 네놈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의미였다. 뒤통수를 긁어대며 지난주에 뭘 잘못했는지 고민하던 차에 경영지원부의 S대리님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주 씨, 혹시 편집부에 강석우 작가님과 미팅한 분 있는지 확인해 주겠어요? 법인카드 사용내역은 있는데 결재가 올라오지 않아서요.”
일단 내 잘못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고, 생각보다 손쉬운 일이라서 안심했다. 한껏 신이 나 앞쪽에 앉은 팀원부터 뒤쪽에 앉은 다른 팀의 과장님에게 강석우 작가의 행방을 해맑게 물었다.
“혹시 강석우 작가님과 미팅하신 분 있을까요? ^^”
단톡방까지 동원하여 강석우 작가와 미팅한 당사자를 찾아다녔으나 범인은 찾을 수 없었고, 살짝 풀이 죽은 채로 경영지원부 S대리님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애석하게도 S대리님이 요청한 건 ‘강석우 작가와 미팅한 사람’이 아니라 ‘강서구에서 미팅한 사람’을 찾는 일이었다. 그럴 리 없지만 문 2개와 계단 너머의 경영지원부에서 7인분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큰 웃음을 판 대가로 더 큰 수치심을 샀다. 사건 이후 한동안 경영지원부를 드나들 때마다 ‘양석우(양서구) 작가님은 만나셨어요?’라는 놀림을 받는 건 덤이었다.
#3
문제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사건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거다. 사오정처럼 사수의 이름 부르는 팀장님의 말에 냉큼 대답하는 건 부지기수였고, 한 번에 지시사항이 5개를 넘어가면 복수 정답이 있는 객관식을 풀듯 몇 개를 선택적으로 골라 실행하기도 했다. 빌런 독자가 우려했던 대로 내 전두엽 어딘가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오메가3를 하루에 서너 개씩 삼켜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걸까.
댄 벨스키 미국 듀크대 교수팀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26세부터 노화가 시작된다고 하던데(진짜다), 마침 첫 취업 시기와 딱 맞아떨어졌다. 노화와 출근의 시작점이 맞물리며 이 몸뚱이가 본격적으로 맛탱이가 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강석우 작가의 행방이 일종의 트리거가 되어 이 사달이 난 원흉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출근만 생각하면 뒷골이 쑤시고 빡치더라, 주말에는 말짱하던 몸이 왜 평일만 되면 골병이 들까,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 했거늘 스트레스의 근원은 항상 회사가 아니었던가.
참을 수 없는 먹고사니즘의 괴로움이네요. 직장, 일, 회사 모두 어려운 이름들이지만 특히나 이른 아침 잠도 덜 깬 채로 몸을 옮겨야 하는 출근만큼 막중한 과업은 없는 거 같아요. 그래서 출근길 지하철에서 모두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거겠죠.
일찍이 ‘밥벌이의 괴로움’을 주창한 소설가 김훈 선생의 강연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강연 시작부터 대뜸 “인생은 고해다. 행복해지려고 애쓰지 말고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더군요. 그 당시에는 저게 무슨 팔자 좋은 소린가 싶었는데 요즘은 출퇴근길에서 조금 수긍이 가기도 합니다. 답이 없는 곳에서 답을 찾으려 하면 안 되죠.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김훈 선생은 에세이집 <자전거 여행>에서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선 힘들었던 오르막이 내리막이 된다고 적기도 했어요. 흠흠. 우리의 출근은 언제쯤 가뿐한 내리막이 될 수 있을까요?
지하철로 출근합니다. 일간 이슬아를 읽고, 뉴닉과 어피티를 훑습니다. 그리고 뉴스레터를 몇 개 더 읽죠. 시사IN과 닷페이스도 봅니다. 그래도 도착하지 않았다면 페북으로 팔로잉 하는 기자들 피드에 들어가봅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걷습니다. 버스는 안 타요. 회사까지는 걸어서 25분. 이때 노래를 열심히 듣죠. 올해는 루피가 플레이리스트에 자주 올랐네요.
출근의 괴로움은 하루 중 상당히 많은 시간을 내 의지와 무관하게 써야 한다는 데서 오는 것 같아요. 등교의 괴로움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래서 앞에 얘기한 것들이 출근의 괴로움을 덜어준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의 첫 덩어리 시간을 제가 계획해서 쓸 수 있으니까요. 일종의 효능감이죠. 뭐랄까. 인생 전체를 내 의지대로 디자인하는 연습을 한다고나 할까.
한편의 라디오 사연과도 같은 에세이군요. <강석우 찾기> 에피소드는 저희끼리 단톡방에서도 라이브되어 꽤나 큰 웃음을 자아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에세이로 재가공을 하다니 역시 문화콘텐츠의 주요 특성은 원 소스 멀티유스다! 하는 생각이 들다가 또 회사에서의 에피소드를 이렇게 다양하게 멀티유스하여 콘텐츠로 만들어내는 파주 님의 모습에서 숭고미까지 느껴진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네요...
찰리 채플린이던가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말한 사람이? 불세출의 레전드 코미디언이 이런 말을 한 걸 보면 비극을 희극으로 풀어내는 일엔 분명 어떤 비범함이 필요한 것 같아요. 비범한 에피소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비극적인 희극 쇼 많이 전해주시길 바랍니다.
업무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사수였다 [밥벌이 에세이] (0) | 2021.08.06 |
---|---|
혼자 걷는 골목은 하나도 쓸쓸하지 않고 [밥벌이 에세이] (0) | 2021.08.06 |
무능하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밥벌이 에세이) (0) | 2021.08.06 |
재택근무도 근무입니다 [밥벌이 에세이] (0) | 2021.08.06 |
여러분의 행운을 기원합니다 (0) | 2021.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