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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은 처음이라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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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야망백수

 

오늘은 첫 출근하는 날이다. 백수에서 직장인으로 인생의 챕터명이 바뀌는 날. 이 챕터에 들어서기 위해 나는 숱한 자격증을 따고 자기소개서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을 해대고 고향을 떠나 상경까지 했다. 실상 방을 구한 곳은 서울이 아니라 인천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이걸 상경이라고 불렀다.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번 챕터는 행복할까, 늦잠을 자면 어쩌나 따위를 고민하다 보니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기상 : 6시 50분

일찍 일어난 김에 평소라면 귀찮아서 넘겼을 면도에 조금 더 시간을 할애했다. 첫 출근은 곧 첫인상이고 밀다 만 수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입을 옷도 심혈을 기울여 골랐다. 면접 때 입은 정장 풀세트를 다시 입을까도 잠깐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오바인 것 같아 그냥 상태가 제일 좋은 네이비 색 니트와 검정 슬랙스를 입기로 했다. 가진 옷 중에선 에이스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었다. 에이스들이 힘을 발휘해서 센스 있고 스마트한 신입으로 보이게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거리로 나섰다.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준비하는데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걸리긴 했지만 아직 시간은 넉넉하다. 출발 : 07시 30분

거리엔 벌써 나처럼 점잖은 니트와 슬랙스를 입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다들 잰걸음으로 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게는 몇 달을 통틀어 가장 일찍 시작한 하루 건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나랑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차림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는 게 왠지 모르게 서운했다. 지구에서 수만 송이 장미를 본 어린 왕자의 심정이 이랬을까. 순식간에 상하는 게 ‘첫 00’의 특성이긴 하지만 첫 출근의 유통기한은 특히나 더 짧은 것 같다. 하지만 내 첫 출근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제 겨우 첫 번째 전철을 탔을 뿐이다. 회사에 제때 들어서기 위해선 먼저 인천 1호선을 타고 종점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탄 다음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서 다시 버스로 환승을 해야 한다. 첫 출근이라고 하면 회사에 도착해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일 텐데, 출근길만으로도 하나의 여정이라고 할 만큼 길고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환승역에 도착하기 두 정거장 전 : 07시 56분

공항철도로 갈아탈 수 있는 인천 1호선의 종점. 사람들은 전철 문이 열리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뛰어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왜 뛰는 줄도 모르고 뛸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난 초행길이라 어디로 뛰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냥 안내 표지판을 꼼꼼히 읽으며 환승 플랫폼을 찾아가기로 했다. 스팅의 노래 '잉글리쉬맨 인 뉴욕'엔 ‘젠틀맨은 걸을 뿐 절대 뛰지 않는답니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수도권의 대전맨이 감히 추론해보건대 뉴욕의 잉글리쉬맨 역시 뛰는 이유를 몰라서 걸었은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이 뛴 이유는 두 번째 지하철이 역에 들어오는 걸 보고서야 알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미 만차인 지하철에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갈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달렸던 것이다. 줄의 앞자리를 선점해야만 서울로 가는 전철을 탈 수 있다니, 가히 K-출근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은 1호선 뿐이고 그마저도 언제나 앉을자리가 넘쳐나는 평화의 도시 대전에서 온 내겐 사람이 많아서 지하철을 못 탈 수도 있다는 건 예측 불가능한 변수였다. 결국 난 충분히 드세지 못했거나 의지가 부족했던 이들 몇몇과 함께 떠나는 지하철의 뒤꽁무니를 처량하게 바라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러다가 지각하겠다.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지하철 놓친 시간 : 8시 10분

7분 뒤에 온 지하철 역시 만차였지만, 이번엔 다행히 탑승에 성공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 사이에 찌그러져 있는 것도 불편한데 지각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계속 시계를 바라보는 이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물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쾌적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첫 출근이었다. 대전에선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다녔었는데, 바람을 느끼며, 강가에서 꽃도 보고 오리 가족도 보고 운이 좋으면 수달도 만나고…. 두고 온 시절 생각에 마음이 조금 심란해지려던 찰나 지하철 창 너머로 한강이 보였다.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서울의 지하철에서 유일하게 낭만적인 순간은 한강을 지날 때면 모두가 창밖을 바라본다는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 있다. 아침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빛나는 한강은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 덕분에 한강 안쪽의 저 도시에서 터를 잡고 살아보려는 시도까지 꽃과 오리와 수달을 희생할만한 가치가 있는 모험으로 느껴졌다. 모험이라는 말은 언제나 약간의 도취를 불러일으킨다. 이제 지각을 하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되었다. 디지털미디어시티 역에서 시계를 봤다. 애매한 시간이었다. 택시를 잡아타면 지각을 확실히 면하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저 멀리 마지막 관문인 마포구 마을버스가 코너를 도는 게 보인다.버스를 탄 시간 : 08시 47분

버스도 역시 콩나물시루였지만 이제 나는 자리는 쟁취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일단 팔부터 들이밀고, 카드를 찍어서 탈 권리를 확보하고, 낯선 이들 틈으로 어깨를 집어넣었다. 기사 아저씨가 다음 차를 타라고 말했지만 내게도 나름의 양보할 수 없는 사정이 있으므로 무시했다. 문 뒤의 한 뼘 정도 되는 공간에 몸을 어찌어찌 끼워 넣으니 그럭저럭 출발해도 괜찮은 상태가 되었다. 이대로 4 정거장만 가면 도착이다. 그런데 아뿔싸, 다음 정거장에서 문이 열릴 때 그만 한쪽 다리가 버스 문에 끼이고 말았다. 그 역은 버스 안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리는 역이었다.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다른 한 발과 상반신을 열려있는 문 뒤로 내민 채로 하차 태그를 찍는 족히 20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과 어색한 눈인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문에 끼어서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읽다 보니 문득 다들 참 늙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들 눈에 나는 앳되어 보이겠지, 바보같이 버스 문에 끼어있으니까. 왠지 첫 출근을 하는 중인 걸 모두에게 들킨 것 같았다. 아직 본격적인 첫 출근은 시작도 안 했는데 너무나도 피곤했다. 마침내 회사에 도착해 인사팀 직원의 환대(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를 받고, 팀원들에게 인사(내일은 빨리 나오겠습니다)를 건넨 시간 : 09:04분

하루를 어찌어찌 마치고 퇴근을 했다. 아침에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오늘 하루를 복기해보니 아무래도 영 첫 출근을 조진 것만 같았다. 하기야 놀라울 것도 없다. 언제나 '첫00'을 조지며 살아왔으므로. 모든 '첫00'은 설렘으로 시작해서 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지하철 창밖으로 한강이 보인다. 이번엔 검푸른 저녁의 한강이다. 강을 건넌다는 건 이전의 시절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메타포인데 오늘은 강을 벌써 두 번이나 넘었다. 하지만 난 이번에도 자전거와 꽃과 오리가족과 수달을 떠올린다. 아무래도 내가 ‘첫 00’을 항상 망치는 건 이전 시기에 좋아했던 것을 쉬이 놓지 못하는 고약한 버릇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오늘 이 고약한 버릇에 발목을 잡혀서 오늘 지각도 하고 버스 뒷 문에도 끼인 것이 틀림없다. 왜 나는 첫 출근을 무작정 설레여 하지 못했나. 설렘이란 건 인생의 다음 단계로 거칠게 착륙할 때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상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에어백 같은 것이니까 충분히 설레여하기만 했다면 첫 출근을 조지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 것도 잃지 않고 다음 챕터로 나아가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해서일까. 아, 모르겠다. 내일부터는 인생의 새로운 챕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참이니 이제 그만 첫 출근의 마무리를 짓는 편이 낫겠다. 한강에 자전거와 꽃과 오리가족과 수달을 묻겠다고 다짐한 시간 :18시 35분

 


마감도비


경력직이었지만(혹은 그래서 더더욱 긴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가짐 때문에) 긴장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일까요, 제 경우엔, 첫 출근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네요. 아, 6호선을 타야하는데 3호선을 탈 뻔 했다는 거, 그래서 굉장히 머쓱했다는 것 외에는요. 참고로 저는 정장 풀세트에 넥타이까지 매고 갔어요. 여름이었네요.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난 다음에는 첫 날부터 일을 받았는데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네요. 하지만 첫 퇴근은 똑똑히 기억나요. 이직이지만 처음엔 빡센 모습을 모여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6시를 넘겨도 퇴근하지 않는 선배들과 함께 앉아 있었거든요. 그런 저를 보고 누군가 ‘집에 갈 수 있을 때 가라’는 얘기를 해주었던 게 기억이 나요. 젠장. 정말이지 인생은 갈 수 있을 때 가야 하는 거 같아요. 말이 험해졌네요. 가야할 때와 가야할 자리를 미리 알았다면 그게 어떻게 인생이었겠어요. 모든 처음, 모든 일회차를 응원해요. 

 

아매오


'오늘부터 1일'은 매번 반복될 수 있지만 첫사랑은 단 한 번뿐이죠. 그처럼 첫 출근이라 하면 어제가 아니라 일 년 반 전이 떠오릅니다. 진짜로 첫 출근했을 때요(인턴 빼고). 난생 처음 들어본 부평이라는 곳에 터를 잡고, 왠지 모르게 살쾡이가 떠오르는 방배동에 출근해야 하는 건 고난도 미션이었죠. 게다가 환승역이 그 유명한 신도림역!(안에서 스트립쇼를~) 출근 전날 예행 연습 삼아 실제 출근시간에 출근길을 가봤다는 건 전 직장 사람들에게도 하지 않은 얘깁니다. 그때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불안과 걱정이었을까요? 아니면 설렘과 기대였을까요? 무엇이 됐든 '처음'일 때만 가질 수 있는 그 복잡한 마음. 새로운 회사에 첫 출근하며 느낀 건, 저는 이제 그 마음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첫사랑처럼 아득한 그 마음. 아련하긴 하지만 그립진 않네요. 하하!

 

파주

정확한 시간과 심리묘사를 보고 있자니 글을 읽는 식은땀이 다 나네요. 저 또한 출근 이튿날에 늦잠으로 1시간 지각 기록을 세운 적이 있는, 반푼이거든요. 당시에 지독한 불면증을 앓고 있던 탓에 해가 뜰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있었는데요.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떠보니 새가 지저귀고 있더군요. 이렇게 몸이 가벼울 수가! 실로 간만에 느껴보는 숙면 후의 상쾌함이었죠. 그 순간 이미 뭐 됐음을 직감했습니다. 알람을 15개나 설정해 둔 스마트폰은 충전기선에서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쓰러져 있었습니다. 보조배터리에 의지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스마트폰 화면은 9시 6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팀장님의 부재중 전화는 덤이었죠. 택시를 타고 가면서 '죽어버려야지'라고 자책했는지 모릅니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니 입맛이 떨어지네요. 오늘 저녁은 굶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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