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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직장인, 바쁜 직장인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7.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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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파주

 

 

어릴 적부터 ‘착하게 생겼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그것이 텍스트 그대로 선하게 생겼다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마땅히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생각에 타인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 착하게 보일 법할 행동을 곧잘 하곤 했다. 이를테면 의자 정리나 쓰레기통 비우기 같이 사소하고 남들이 귀찮아하는 것들.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착하게 생겼다’는 말이 실제로는 못생겼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거란 사실은 꽤 나중에서야 알았다. 지기랄.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했다고 해서 만사형통인 것은 아니었다. 일단 나의 못생김은 그리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분한 마음에 대뜸 행동거지를 바꾼다면 ‘갑자기 얘가 왜 이래’라며 반감만 얻을 게 뻔했다. ‘그래, 못생기면 착하기라도 해야지’라는 통렬한 자기반성 뒤에 착한 사람 콤플렉스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 주변에는 나처럼 ‘착하게만 생긴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심성이 고운 이들이 많았다는 거다. 그들은 무엇을 받든 늘 곱절을 주었다.

문제는 나이를 먹고 사회에 나와서부터 시작되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나처럼 착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긴코원숭이뿐이라면 좋으련만(으 끔찍), 잘생기고 잘난 것들이 즐비했고(다행이다) 성미가 사납고 괴팍한 짐승 같은 놈들도 잔뜩 있었다.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정글에서 선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모두가 내 맘 같을 순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사회생활 초기에 유독 바쁜(척하는) 사람과 프로젝트를 함께 할 때마다 진이 빠졌다. 나이가 어려서 우스워 보였던 걸까. 아니면 내 경력이 하찮아서였을까. 진행하는 프로젝트 마감이 코앞인데도 감감무소식이었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늘 내 몫이었다. 한껏 공손한 태도로 두 손을 비비적거리면서 부탁을 해도 바쁘다는 매정한 말 한마디에 소득 없이 돌아간 적도 많았다.

‘바쁘신 건 잘 알겠는데, 우리, 팀 아니었어요? 같은 프로젝트 하잖아요?’라며 터져 나오려는 말을 목구멍 안으로 애써 삼킨 적도 자주 있었다. 무슨 일하는지 뻔히 다 아는데. 자기만 일 많은 척 바쁜 척 연기하는 게 월급에라도 포함된 건가. 세상에서 제일 바쁜 사람들과 부대끼며 호되게 당할 때마다 ‘착하면 호구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체감했다.

“아니, 같은 프로젝트를 하면 서로 으쌰으쌰 하면서 돕는 게 이상적인 팀플레이 아니냐고요. 세상에서 지들이 제일 바빠.”

어느 주말, 친한 선배를 만나 긴 푸념을 늘어놓았다. 두어 시간 이어진 하소연을 가만히 듣고 있던 사회생활 만렙의 영민한 선배는 의외의 조언을 건넸다.

“그럼 이 악물고 나쁘게 한 번 말해봐.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말하다 보면 너만 힘들어져. 의미 전달이 제대로 안 될 때도 많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랬다. 행여 상대방의 기분이라도 상할까 싶어 에둘러 말하다 보면 정확한 요구 사항을 온전히 전달하기가 힘들었다. ‘에... 그러니까 금요일까지 달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부탁이겠죠...?’ 이런 식으로 선택권을 무한대로 주며 말하다 보면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마감일은 늘 뒷전으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저 친절하게 말하려 했을 뿐인데,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내 태도에만 신경을 쓰다가 정작 메시지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문제는 메신저인 내 쪽에 있었던 거다.

문제의 원인이 나의 태도 혹은 말버릇인 걸 알고도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마치 정권 지르기라도 하듯 말도 내지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마음만 먹는다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대신에 내 나름의 방식을 찾아냈다. 착하게 (못)생긴, 어딘가 간절해 보이는 인상을 적극 활용하는 거다. ‘에... 그러니까 무리한 부탁인 건 아는데 금요일까지 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제발요...’ 가끔씩 고달플 때도 있지만 어쩌겠나,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생존전략인 것을.


마감도비


“아니, 같은 프로젝트를 하면 서로 으쌰으쌰하면서 돕는 게 이상적인 팀플레이 아니냐고요. 세상에서 지들이 제일 바빠.” 순살됐습니다..ㅠㅠㅠㅠ 노상 바쁜 척하느라 풀칠레터 마감 때마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저의 정권을 때리는 글이네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 같은 나쁜 인간, 나쁜 직장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 저도 최근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네요. 같은 직장 동료는 아니지만 같은 업계에서 일을 하는 입장에서 공손하게 얘기했다가 쉬운 사람으로 인식됐는지 그 다음부터는 자꾸만 요구가 많아지더라구요. 결국 통화로 일부러 한숨까지 내쉬어 가며 각을 세우다 일을 매듭지었습니다. 바야흐로 나쁜 놈들 전성시대네요. 이기적이고 뻔뻔한 사람이 득세하는 곳은 사회가 아니라 정글이죠. 우리가 정글이 아닌 사회를 살고 있는 건 파주 님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항상 고맙습니다.

 

아매오


남에게 나쁜 직장인이 되지 않으면 자신에게 나쁜 직장인이 돼 버리고 맙니다. 결국 나쁜 직장인이 되지 않는 길은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는 얘기죠. 그렇다면 그걸 꼭 '나쁘다'고 봐야 할까요? 기본값이 나쁜 세계가 직장인의 세계라면, 직장을 지옥이라 불러도 과언은 아니겠군요. '나에게 나쁘느니 남에게 나쁘게 하는 게 낫지'와 '남에게 나쁘게 하는 것보다 그냥 나한테 나쁘고 말지' 사이에서 진자운동하는 게 우리네 직장생활인가...

 

야망백수


바쁘다 바빠 빌런 여러분들 잘 보세요. 착하디착한 파주 님이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했잖아요. 자기를 배려하려 했던 누군가를, 그 배려하려는 마음 때문에 자책하게 만든다는 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아, 제가 좀 바빠서요”라는 말은 일로 얽히지 않은 사이에서나 통하는 얘기라는 공감대가 널리 널리 퍼지길 바랍니다. 일단 저부터 돌아봐야겠네요. 저는 앞으로 일을 감당 못해서 동료에게 피해를 주게 될 것 같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요...진짜...휴...전 쓰레기에요...흑흑...” 그러면 착한 동료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능력이 부족하신 건 잘 아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제발 금요일까지 주시면 안 될까요...?” 착한 마음으로도 할 말 다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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