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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무 끝에 통찰 온다 [밥벌이 에세이]

밥벌이 에세이

by 풀칠러 2021. 8. 7.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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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 아매오

 

“일은 어때?”

최근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퇴사와 이직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으니 상대 입장에서도 인사치레 소재로 이만한 게 없었을 테다. 어쨌건 아예 무관심은 아니라는 뜻이니 나로서는 좋은 일이다. 때문에 항상 성심성의껏 대답하려고 노력한다. ‘그냥 뭐 할 만해요’나 ‘회사가 다 거기서 거기지’ 같은 말은 되도록 피한다. 최대한 구체적으로 얘기한다. 물론 TMI가 되기 전에 멈추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일은 어떻냐고? 전 직장과 비교하면 일의 내용, 형태, 템포, 밀도 측면에서 완전히 달라졌다. 내용과 형태는 그 범위가 넓어졌고, 템포와 밀도는 높아졌다. 게다가 아직 일의 전체 프로세스를 경험하지 못해 일정 관리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조금 정신사나운 상태로 우당탕탕 업무를 훑고 가는 경우가 많다. 불만을 가질 틈도 없다. 불만이 생긴다는 건 적응 끝이라는 신호이니 오히려 굿뉴스다. 

격무는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능력이든 경험이든 내 수준을 상회하는 순간 그 일은 별 수 없이 몹시 고된 업무가 된다. 아유 힘들다…하면서 조금씩 판단을 내린다. 이거 할 수 있긴 있겠다 혹은 난 이거 못해ㅠ 물론 이미 가진 것을 바탕으로 미지의 영역을 잘 헤쳐 나가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이 가진 힘을 통찰력이라고 한다. 나는 못 가진 것 같다.

미지의 영역을 잘 헤쳐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올해 초여름 나는 ‘보고 배울 사람이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 가본 길에 멋대로 내딛는 발걸음이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 탐탁치 않았다. 사수가 없어서 짱난다! 백날 외치고 다닌다고 훌륭한 사수가 뿅하고 등장하는 게 아닐 텐데도 한동안 고민이랍시고 들고 다니며 여기서 쫑알쫑알 저기서 쫑알쫑알 돌아다녔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말을 해줬다.

“사수가 없어서 느끼는 불안함은 차라리 잘 맞지 않는 사수 때문에 생기는 답답함보다 훨씬 나아요. 자, 좋게 생각해봅시다. 사수 없이 크는 사람은 새로운 길을 혼자 가보는 감각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제 생각에 그건 지금 같은 시대의 콘텐츠 기획자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역량이에요.” 

‘보고 배울 사람이 없어서 불안하다’를 ‘새로운 길을 혼자 가보는 감각’으로 재정의한 게 인상깊었다. 그리고 좀 부끄러웠다. 나는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할 고민을 존재하지도 않는 사수에게 떠넘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통찰력은 가이드라인을 따라간다고 얻을 수 있는 보상 아이템이 아니라 부딪히고 깨지고 아물고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없어서 격무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격무에 ‘잘’ 시달려본 사람만이 통찰력에 가까워진다는 말이다. 유레카! 잘 나가는 일잘러들이 인터뷰만 하면 짠 듯이 ‘워커홀릭’과 ‘번아웃’의 경험을 토로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다. 그냥 말도 안 되게 일이 많은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일의 효율성을 높이고 프로세스를 최적화하면 그 수준을 감안해 더 많은 더 중요한 일이 배정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내가 속한 조직 자체가 요상한 체계로 굴러가는 중일 수도 있다. 또는 구성원 중 하나가 영악하게 자기 일을 동료들에게 외주 맡기듯 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기를 잘 넘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일의 주도권을 쥐고 싶다. 일에 내 일상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의 한 조각으로 일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꼭 필요한 수준의 목표를 설정하고 알맞은 방법과 효율적인 리소스 관리를 통해 적절한 성과를 내는 한편 돌발적인 이슈에 침착하게 대응할 만한 역량을 원한다. 더욱 장기적인 관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좋은 동료가 되어 팀으로 성과내는 경험을 쌓아가면 좋겠다.(20.12.23)

 


마감도비


‘일에 내 일상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일상의 한 조각으로 일을 끌어들이는 것’이 목표라는 문장이 무척 인상적이네요. 일에 대한 욕심이 있는 사람만이 품을 수 있는 목표니까요.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어디엔가 올라탔지만 그게 로켓이 아니라 호랑이 등인 사람 입장으로서 부디 건강을 잘 챙기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더 나은 일을 위해 달려가는 아매오님이라면 미지의 영역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늘 응원해요.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야망백수


격무의 모가지를 꺾고 끌고 가려는 결의가 느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격무’에서도 나름의 긍정적인 면을 뽑아내는 아매오님의 능력은 가히 사막 한 가운데에서도 오아시스를 찾아내는 베어그릴스급인 것 같습니다. 아매오님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격무는 결국 아매오님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이군요. 그러나 노파심에 말합니다. 꺾어도 꺾이지 않는 모가지도 분명 있을 것이고 그런 격무는 결국 아매오님을 쓰러뜨리게 될겁니다. <풀칠>이 일잘러를 위한 미디어가 되는 걸 경계하는 저 야망백수는(새는 양쪽 날개로 날죠) 이렇게 생각합니다. 격무라고 느껴진다면 정말로 걍 일이 많은 거라고. 잘 해내면 좋겠지만 더 좋은 건 ‘격무에 시달리지 않고’ 일 하는 거라고. 허허. 새해엔 격무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필요이상의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그러냐구요? 저기 파주님 보세요. 코멘트에 무려 ‘통렬한 자기반성’을 한다고 써놨다구욧...!

 

파주

격무에 대한 고민을 들으면 '원래 다들 삘 받을 때만 무언갈 하지 않느냐'고 장난스레 되묻곤 하지만, 아매오 님 같은 분 앞에서는 입을 다물게 됩니다. 격무에 대한 고민에 일을 잘하고 싶다는 진지한 프로정신과 좋은 동료,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선한 욕심이 물씬 풍겨나왔거든요. 동시에 저의 지난날을 떠올려보며 통렬한 자기반성을 또 1회 시행했습니다. 제가 격무에 시달리는 이유는 마감 직전까지 늘 미루고 미루는, 지독한 게으름이 빚어낸 괴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이들은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착취한다고들 하는데, 저의 경우는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나를 착취하는 모양새인 것 같아요. 이렇게 반성을 한다 해도 다음 마감 앞에서 또다시 허덕이고 있겠죠. 미리 한번 더 반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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